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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초혼묘(招魂墓) 가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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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수산(水山) 김우진(金祐鎭, 1897~1926) 선생의 초혼묘(招魂墓)를 다녀왔다. 초혼묘는 말 그대로 넋을 부르는 묘로 시신이 없는 묘를 말한다.

수산의 초혼묘는 청계 월선리에서 일로로 가는 길목의 산 정상에 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묘소까지 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어떻게 이런 장소에 묘를 썼을까? 그런 의문은 산의 정상을 오르니 쉽게 풀렸다. 초혼묘는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김우진이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지금의 들판은 바다였다. 윤심덕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진 수산의 영혼을 고향 땅으로 부르기 위하여 그 가파른 산의 정상에 초혼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정표가 없어 수산 선생의 초혼묘를 찾지 못하고 산속을 헤매다가 돌아온 지 1년을 넘겨버렸다. 마침내 박관서 작가의 안내로 초혼묘를 찾아 술 한잔 올릴 수 있었다. 

참배객은 다섯 명이었다. 박관서 작가. 무안문화원 이용식 사무국장, 55아트센터 박재용 대표 그리고 우리 부부. 

수산의 초혼묘에 술을 올리는 감회가 남다르다. 신극의 개척자요 뛰어난 평론가였다. 한국연극의 자산이자 목포와 무안의 자랑인 그의 문학적, 연극적 유산의 일부는 목포문학관 2층에 보관되어 있다.

김우진의 이야기를 블로그 글로 짧게 쓴다는 일이 어렵다. 길게 쓰자니 소설이나 논문이 될 거 같고, 짧게 쓰자니 더욱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도 짧게 요약해 본다.

블라드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와 콘스탄틴 스타니스랍스키의 창조적 만남이 세계 연극의 본산 모스크바예술극장의 탄생으로 이루어진다.

오사나이 가오루와 히찌가다 요시의 창조적 만남이 일본 신극의 요람 쓰키지소극장의 탄생으로 이루어진다. 

김우진과 홍해성의 창조적 만남은 김우진의 죽음으로 마지막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들이 이루어내지 못한 꿈은 우리 후세 연극인들의 몫이다. 그래서 대구시립극단의 정기공연 <몽키열전>에서 이렇게 썼다.  

님에게 드리는 편지

  님의 고향 대구에서 정유년(丁酉年)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님의 고향에서, 그것도 대구를 대표하는 시립극단 배우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졸작 <몽키열전>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님과 저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습니다. 님은 일본 신극(新劇)의 요람(搖籃)인 쓰키지(築地) 소극장에서 전속배우로 활동한 유일한 한국인이셨습니다. 일본에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최초로 소개한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와 메이에르홀드에 매료된 히찌까다 요시(土方与志)의 문하생으로 연극의 기본기를 확실하게 배운 최초의 신극 연극인이셨습니다. 누가 뭐래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고, 학위논문과 저서에서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세계연극의 본산이 된 것도, 쓰키지 소극장이 일본 연극의 요람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훈련된 배우와 전용극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친구(金祐鎭)가 자살하지만 않았어도 님과 우진은 러시아의 네미로비치-단첸코와 스타니스랍스키, 일본의 오사나이 가오루와 히찌가다 요시가 되어 한국연극의 발전을 최소한 20년은 앞당겼을 겁니다. 

  님은 신파연극이 난무한 한국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연극의 새로운 터전을 일궜습니다. 우진의 죽음으로 한쪽 날개를 잃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신극의 정립과 연극의 대중화에 평생을 보냈습니다. 님의 빛나는 업적이 다소 축소되고 지연되었지만, 마침내 ‘한국연극사’는 당신의 공적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님은 이 땅에 스타니스랍스키와 메이에르홀드의 이름을 최초로 알린 연극인이었습니다. 님이 존경해 왔던 스타니스랍스키와 메이에르홀드의 장점을 융합한 박흐탄코프의 ‘환상적 사실주의’ 연극이 당신의 고향에서 무대에 오릅니다. 

  연극 <몽키열전>을 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처음에는 주요 배역을 서울에서 초청하는 방안도 구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립극단 배우들의 열정에 모험(?)을 걸기로 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지역연극의 미래를 위한 체계적인 연습과정도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옹골차게 시립극단 배우들만으로 출연진을 확정했습니다. 

  제가 쓰고 연출한 작품이기에 이 연극만은 잘 압니다. 이번 대구시립극단의 <몽키열전>이 서울에서의 초연 무대보다도 마음에 듭니다. 두 작품의 연습과정을 지켜본 몇 분의 전문가들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평가가 대구연극의 저력과 배우들의 열정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연극의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의 연극적 안목도 좋아졌습니다. 대구가 공연도시로 비상하고 있습니다. 지자체와 문화재단, 지역 연극인들이 대구연극의 중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서울을 제외한 그 어떤 도시보다도 공연장이 가장 많이 있는 도시가 대구랍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님 시절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이 문제는 대구뿐만이 아니라 한국연극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대구연극계에 체계적인 연기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님과 함께 희망해 봅니다. 
  님의 후예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소서. 
  홍해성(洪海星) 선생님! 

  대구와의 새로운 인연을 맺어준 최주환 예술감독께 감사를 드립니다. 땀 흘린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열렬한 박수를 보냅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그들에게 대구연극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김우진 선생 초혼묘
초혼묘는 바다를 향하고 있다.
박관서 작가의 집, 구절초, 2022년 11월 20일

후기: 김우진은 전남, 홍해성은 대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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