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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잠일기(栢蠶日記)

내 마음의 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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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세 번째; 조규현, 상 다섯 번째 필자, 여성 무용수 대부분은 현역 대학교수)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는 수변공원이 있다. 그 공원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건축물이 있다. 하나는 청나라풍의 정자이고 또 하나가 네덜란드풍의 풍차다.

 

영산강 수변공원에 어울리지 않는 정자와 풍차가 오늘 새롭게 다가왔다. 눈이 내리는 이른 아침의 수변공원에서 그 풍차를 보면서 문득 영화내 마음의 풍차>를 떠올렸다.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거장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1976년도 작품이다. 영화에는 지금은 원로배우인 사미자 씨와 당시 인기가 많았던 전영록 씨가 나오고, 주인공은 민철이란 예명의 배우였다.

 

영화배우 민철의 본명은 조규현이다. 대학 3년 선배인데 극단 자유극장에서 대학 1학년 때 만났다. 규현이 형은 자유극장의 젊은 주인공 역은 항상 독차지했다. 연극 무엇이 될고 하니에서도 남자 주인공 역은 형이 맡았고, 여자주인공 역은 가수 한영애 씨가 맡았다.

 

영화 <내 마음의 풍차>로 백상예술상 남자 신인상을 수상한 형은 영화보다는 연극에 미친 배우였다. 대학도 중퇴하고 극단 작업에 더 열중했다.

 

우리는 대학 선후배라는 공감대도 있었지만, 상대에 대한 알 수 없는 매력에 푹 빠져 친형제 이상의 형제애를 느끼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당시 자유극장에서는 무용가 김화숙 교수를 초청하여 현대무용을 훈련했다. 김화숙 교수도 내 무술에 관심을 두고 내 수업에 들어오기도 했다.

 

어쨌든 연기자에게 현대무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우리는 김 교수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 나가 현대무용을 열심히 훈련했다. 그때만 해도 무술 고단자인 내 관점에서 볼 때, 형의 무용 실력은 체조 수준이었다.

당시는 우리나라 무용계에 남자무용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때였다. 그래서 나와 형은 무용 쪽에서 욕심을 내는 쪽이었고, 미국에서 귀국한 이정희 교수가 안무한 작품에서 우리는 큰 역할을 해냈다.

 

그때는 연극보다도 현대무용에 더 많이 출연했다. 현대무용에 출연한 유인촌, 박상원 배우들이 통나무 구르는 소리가 났다면, 나는 제비처럼 하늘을 날았다.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5분을 독무를 할 만큼 내 몸은 유연했고, 어떤 작품은 남자들의 몸을 위한 안무지도를 하기도 했다. 배우 윤승원도 그렇게 만났고 나중에는 친구가 되었다.

 

현대무용에 빠진 형과 보석을 만난 무용계의 기대가 어우러져 형은 문화예술진흥원 해외연수 프로그램 현대무용 부문에 선정되어 뉴욕으로 떠났다, 동양의 니진스키를 꿈꾸며 현대무용의 본고장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형이 잠시 귀국하여 한번 만났다. 그리고 형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오지 않았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 생활고에 시달려 무용수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단 하루도 몸을 쉬어서는 안 된다는 형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나는 오랫동안 수련했던 무술과 형과 함께 뛰었던 현대무용을 접목하여 연기자 신체훈련이라는 분야를 개척했고, 러시아에서 귀국한 후로는 무용학과의 대학원에서 연기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때의 제자들이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활동하고 있고, 더러는 신체훈련의 전문가로 연극 쪽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공연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연극이나 무용은 동일한 예술이다. 연극도 무용을 수용해야 하고, 무용도 연극을 수용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직도 그걸 모르는 연기자나 무용수가 많다.

 

독특한 캐릭터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배우 조규현, 그런 배우가 아쉽다. 아직도 입으로만 연극을 하는 배우들이 많다. 형이 대학을 중퇴하지 않고 계속 공부를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석사학위라도 있었다면 연극이든, 무용이든 어떤 쪽에서든 한 위치 할  인재였다.

 

순수예술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풍토다. 창작에만 열중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 아쉽다.

 

저 풍차 옆에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될 수 있는 배우인데!”

 

사진을 찍으면서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다. 형과 함께 공연하던 일, 형과 함께 염리동 연습실에서 밤을 새워 예술을 논했던 일, 연습실 지하 카페 항아리에서 생맥주 마시던 시절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우리의 마음에는 풍차가 있다.

그 풍차를 사랑이라는 바람으로 돌리든

일과 열정이라는 바람으로 돌리든

우리는 풍차를 돌려야 한다.

 

멈춰 버린 저 풍차처럼

우리 마음속의 풍차는 멈춰 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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