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의 극작가 차범석 선생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TV 드라마 최장수 프로그램인 <전원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가 바뀌어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배우’ 최불암과 김혜자 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중은 스타만을 기억한다. 드라마의 산파 역할을 한 작가와 연출가는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이 아니라 이름조차도 모른다.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차범석 선생이 방송극 <전원일기>의 초창기 극본을 썼다는 사실을 60대 배우들도 잘 모른다. 그렇다고 차범석 선생이 방송작가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목포 문학박람회 둘째 날인 지난 10월 8일 목포에서는‘차범석의 날’ 행사가 있었다. 모든 행사가 다 그러하듯 차범석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그가 남긴 포스터 몇 장과 사진 몇 장이 차범석 거리를 외롭게 지키고 있다.
그날 나는 대학원 강의가 있어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물론 대학원생들을 목포로 불러 현장 수업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강의 앞과 뒤에 다른 수업들이 있어서 달리 방법이 없었다.
차범석 선생에 대한 글이나 작품에 대해선 책도 많고 인터넷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차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에 대해서 약간 언급하고, 우리들의 고향 목포가 어떻게 스토리텔링과 콘텐츠화할 것인가에 대해서 평소의 생각을 조금만 말하고자 한다.
필자의 소설 <혼자 뜨는 달>이 있다. 이 소설이 출판되기 전에 발표된 희곡이 있다. <초신의 밤>이란 제목으로 광주일보 창간기념 문예공모 ‘희곡’부문에 응모하여 가작으로 입선한 작품이다. 이 희곡의 심사위원이 차범석 선생이다.
이 희곡은 광주시립극단 제8회 공연작으로 필자 연출로 광주에서 초연되어 1986년 3월 서울의 ‘실험소극장’에서 한 달간 공연되었다. 그때 공연장을 찾아오신 차범석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각설하고, <혼자 뜨는 달>의 상업적 성공으로 나는 꿈에 그리던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그때 ‘김익주’라는 제자가 서울극단‘부활’의 작품을 모스크바에 초청, 공연하게 되었는데 차 선생님도 그 일행과 함께 모스크바에 오시게 되었다.
차범석 선생과 배우들을 모스크바의 우리 집에 초대하여 돼지머리 고기와 러시아식 순대, 이크라(철갑상어 알) 등으로 대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 모스크바의 어떤 나이트클럽에서 밤새워 한국춤을 췄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젊은 시절 차범석 선생님이 무용가 최승희의 춤에 매료되었고, 한국무용도 배웠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러시아에서 귀국하여 차 선생님을 두 번 만났다. 고인이 된 연기자 김길호 선생과 함께 만났는데, 두 분은 목포 출신인 내가 러시아에서 스타니스랍스키를 전공한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내 일을 스스로 하는 스타일이라 한국연극계의 대부인 차 선생님께 특별히 부탁할 일도 없었고 신세를 질 일도 없었다.
차범석 선생님의 작품을 딱 한 편 연출한 경험이 있다. 경기대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연기학과의 첫 졸업작품을 지도교수로 참여하며 <산불>을 직접 연출하였다. 여학생들이 많아 이 작품을 선정했고, 교내가 아닌 대학로에서 공연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차범석 선생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나는 항상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다.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연극인 차범석은 목포가 낳은 인물이 아니라, 목포를 빛낸 국민극작가’라고 확신한다.
김우진, 차범석으로 대표되는 목포 연극의 거대한 뿌리는 한국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목포문학관에 박제된 유품들이나 ‘차범석 거리’, ‘차범석의 날’로 방치되어서는 곤란하다.
인근에 있는 ‘유달예술타운’을 새롭게 단장하여 차범석 기념극장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리하여 차범석 작품을 전문으로 공연하는 극장으로 재탄생시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야 한다.
의식 있는 배우들이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한다. 그런 배우들이 재충전하는 기분으로 2~3개월 목포에 내려와 훈련하며 연습하여 작품을 만들고 주말에만 공연하는 방식이다. 물론 초기에는 목포시나 전라남도의 행정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지하실 골방 같은 ‘차범석 작은 도서관’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 팔려버린 생가를 목포시나 전남도가 매입하여 ‘연극문학도서관’을 만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생명처럼 여기는 내 장서들을 조건 없이 기증할 용의가 있다.
내킨 김에 얘기를 더 꺼내겠다.
‘차범석극작아카데미’를 만들면 된다.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능력 있는 극작가 2명만 초청하고 방송작가, 시나리오작가, 스토리텔링 작가들은 마지막 후반기에 1~2개월씩 초빙하여 작품을 만들면 목포의 위상이 달라진다.
모든 이야기의 출발은 극작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를 멀티유즈화 한다면 목포는 스토리의 도시가 되고 문화콘텐츠의 메카로 부상할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소설, 연극, 뮤지컬, 방송, 영화, 게임으로 진화되어 관광화, 산업화로 연결된다.
김우진, 차범석 두 거장을 배출한 목포가 깊게 고민할 시기가 되었다. 목포문학상 상금만큼만 투자해도 가능한 일이다. 광주시립극단 1년 예산만 투자해도 좋다. 대한민국 4대 관광도시 목포의 미래가 ‘스토리’에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둔다.
이야기 도시(Story City) 목포의 변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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