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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금토끼의 탄생 홍암 선생을 뵙던 날, 공께서는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기념관에 있는 홍암사(弘巖祠)와 생가에 있는 일지당(一之堂)에서였다. 환청일까? "바다로 가거라. 가까운 바다로 가거라. 그리고 하늘을 보아라. 『삼일신고』의 '허공' 편을 아느냐? 그 허공에 뭔가가 나타날 것이다." 『삼일신고』는 대종교의 경전이다. 『천부경(天符經)』·『팔리훈(八理訓)』·『신사기(神事記)』와 더불어 대종교의 계시경전(啓示經典)으로,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기는 보경(寶經)이다. 특히 『삼일신고』의 ‘三一’은 삼신일체(三神一體)·삼진귀일(三眞歸一)이라는 이치(理致)를 뜻하고, ‘신고(神誥)’는 ‘신(神)의 신명(神明)한 글로 하신 말씀’을 뜻한다. 여기서 『삼일신고』가 홍암 나철 선생께 전달된 경위를 소개한다. 에 실린 그대로 옮긴.. 더보기
나철과 대종교 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홍암 나철은 왜 대종교를 중광하였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단군은 어떤 존재인가? 홍암 나철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민족과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새벽은 밝아오는데, 아직도 글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네.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나철은 승정원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 벼슬을 시작해 왕의 곁에서 밤낮으로 머물렀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홍암이 후에 대종교를 창시하는 사상적 토대를 이룬 것은 그때의 독서가 큰 몫을 하게 된다. .고종은 관복과 말을 하사할 정도로 홍암을 총애했다. 국운이 기울자 홍암이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고종은 세 번이나 반려한 끝에 허락했다. 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임명했지만 거절하고 고향 벌교로.. 더보기
홍암 나철 선생을 만나다 어제는 보성에 다녀왔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꼬막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벌교에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민족의 선각자이신 홍암 선생이 홍합이나 꼬막만큼도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씁쓰레하다. 홍암 나철 선생의 이야기는 개천절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간략하게 언급했었다. 원래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윗대에서부터 차례대로 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후대 인물인 홍암 선생 이야기는 아직도 멀었다. 생각을 바꿔 오늘부터 홍암 선생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라 꼴이 엉망이다. 여야가 한 치의 양보 없이 서로 싸우기만 하고 있다. 나라에 어른도 없고 바른 소리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나철 선생의 본명은 인영(寅永)이며 호는.. 더보기
개천절 새벽 '하늘이 열린 날'이다. 원래는 대종교의 절기에서 비롯되었으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족의 기념일로 채택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1949년 국경일로 공식 제정되었다. 지금의 국경일은 양력 10월 3일이지만, 단군 관련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의식을 갖는다. 대종교(大倧敎)의 중광자(重光者) 홍암(弘巖) 나철(羅喆) 선생은 독립군의 대부로 위대한 사상가였다. 1863년 12월 2일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나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하셨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29명 중 21명이,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또한 박은식·신채호·이상설·김두봉·신..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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