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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나철과 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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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의 나철

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가?

 

홍암 나철은

왜 대종교를 중광하였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단군은 어떤 존재인가?

 

홍암 나철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민족과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새벽은 밝아오는데,

아직도 글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네.

운양 대감은 대종교의 중광에도 참여한 스승 김윤식을 지칭한다.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나철은 승정원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 벼슬을 시작해 왕의 곁에서 밤낮으로 머물렀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홍암이 후에 대종교를 창시하는 사상적 토대를 이룬 것은 그때의 독서가 큰 몫을 하게 된다.

 

.고종은 관복과 말을 하사할 정도로 홍암을 총애했다. 국운이 기울자 홍암이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자  고종은 세 번이나 반려한 끝에 허락했다. 후에 징세서장(徵稅署長)으로 임명했지만 거절하고  고향 벌교로 낙향하여 10년간을 지냈다.

 

대종교 독립운동관

기념관은 보성군이 7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홍암 서거 100주년을 맞는 해인 2016년 11월 2일에 추모문화제와 함께 개관하였다.  홍암나철기념관은 사당 홍암사, 개천문, 전시관인 홍암관, 대종교 독립운동관, 자료실로 구성되어 있다.

홍암관과 자료실
사당 홍암사

 

 

을사조약문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1904년 나라의 위기를 느낀 나철은 서울로 돌아와 비밀단체 ‘유신회(維新會)’를 만들어 항일 애국계몽운동에 나선다. 1905년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은 홍암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매국노 5적을 처단하자는 ‘간신의 목을 베는 글’을 남기고 폭탄을 보냈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청컨대 결사의지로 이 5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없앤다면 우리와 자손들은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으리라. 그 성패가 오늘의 할 일에 달려 있으며 여러분의 생사 또한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재주 없는 인영이 이러한 의무를 주창함에 눈물을 흘리며 피가 스미는 참담한 마음으로 엎드린다. 피가 뛰며 지혜와 용기를 갖춘 여러분의 면전에 이 뜻을 내놓는다.”

 

홍암은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실행에 옮기려했던 우국지사였다. 의거가 실패하고 나철은 자수하여 10년 유배 형을 받았다. 신안군 지도에서의 귀양살이 넉 달 만에 고종이 특사를 내려 그를 풀어주었다.

 

홍암은 다시 대일외교항쟁으로 방향을 바꾼다. 일본으로 건너가 모두 네 차례의 외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펼쳤다. 홍암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그의 가슴 속에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 즉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신심(信心)이 불타고 있었다. 나라가 망했다는 절망감 속에서 도존(道存), 즉 단군사상을 계승하여 광복의 희망을 찾겠다는 역사 인식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단군신앙을 접한 홍암은 1909년 음력 115일 서울에서 대종교를 중광(重光)했다. '중광'이란 이미 창시되어 있는 가르침을 거듭 빛낸다는 뜻이다. 나철은 단군신앙을 통한 국학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암은 국망도존(國亡道存)'의 대의(大義)로 꺼져가는 조국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자 했다. 단기연호를 사용하고 개천절을 제정하는 등 선도문화(仙道文化)의 부흥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불과 5~6년 사이에 30여만 명이 참여하여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대종교의 교세에  놀란 일제가 191510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였다. 다른 모든 종교단체의 신청은 접수하면서 대종교만은 거부하였다. 나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천제를 올리고 순명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29명 중 21명이,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또한 박은식·신채호·이상설·김두봉·신규식·김좌진·홍범도·이범석·안희제 등 대다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한마디로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본부였다. 홍암 나철을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명 직전의 기념사진
예언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파호에 있는 대종교 3종사 묘역

홍암의 제자인 서일(徐一)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부하인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를 진두지휘했다. 김교헌(金敎獻)은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역사서를 펴냈다. 홍암을 포함하여 이들을 대종교 3종사라 부른다. 그들의 묘역은 지금도 중국에 있다.

 

대종교 교인인 김두봉(金枓奉)과 최현배(崔鉉培)는 한글을 지켰다. 대종교 교인인 신채호는 조선의 역사를 다시 썼다. 나철이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를 더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정부가 그의 공훈을 기리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나철 초혼비
천부경비

 

홍암사 내부

홍암 나철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도 뜻깊은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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