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바닷가에 갈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바닷가로 나가서 갈매기들과 함께 놀았는데 무리를 지어 날아오는 갈매기 떼들이 백 마리도 넘는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듣자 하니 갈매기들이 너와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구나. 갈매기를 몇 마리 잡아 오거라. 나도 함께 놀고 싶구나.”
다음 날 아침 아들은 평소와 같이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갈매기들은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열자(列子>의 '황제' 편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침 블로그에 소개했듯이 어제는 새벽에 영산강 주룡나루를 다녀왔습니다. 이슬비가 내리는데도 오후에는 영산강 하구언 아래쪽 바닷가에 갔습니다.
언젠가 소개했던 그 가로등 위에 갈매기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순시를 하던 수자원공사 젊은 직원 둘이 가로등 근처로 오고 있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갈매기는 가로등을 떠나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안개에 쌓인 삼학도와 유달산을 열심히 담았습니다. 유달산의 풍광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합니다. 하구둑 쪽에서 바라보는 목포 바다는 참으로 아늑합니다. 유달산과 삼학도가 하나의 섬으로 느껴집니다.
마음을 비운 탓일까요? 날아갔던 갈매기가 곧 돌아왔습니다. 가도등 위에 살포시 앉아 온갖 포즈를 다 취해 주었습니다. 정성을 다하면 갈매기가 마음을 열어줍니다.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그 바닷가에서 이 예븐 갈매기와 1시간 이상을 함께 놀았습니다. 갈매기는 인간과 매우 친숙한 새입니다. 열자의 표현의 들지 않더하도 문득 영특한 조류임에 틀림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일까요. 이슬비까지 내리던 하늘이 잠시 변하더니 태양이 살포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긴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갈매기를 중심으로 곱디고운 그 태양의 위치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갈매기와의 소통과 유희는 약 51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가로등의 높이가 있었기 때문에 저의 목과 높게 올린 두 손은 거의 마비가 되었습니다. 갈매기로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곤했던지 다리를 바꿔가며 외다리로 서기도 했으며 양 날개를 쭉 펼쳐 이완을 시키해도 했습니다.
200컷 이상의 사진을 20개로 압축하는 일은 고통입니다. 결국 2회에 걸쳐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태양이 잠시 비췄던 장면은 이번에 공개합니다. 그러나 갈매기의 결정적인 묘기는 내일 공개합니다.
<열자>의 우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갈매기를 잡아가겠다는 속마음을 숨기고 평소와 다름없이 바닷가에 나갔지만 갈매기들은 아들의 속마음을 눈치 채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아들이 아무리 속마음을 숨겼지만 행동이 그날따라 뭔가 달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스타니스랍스키의 신체적 행동법입니다. 그 갈매기는 신체적 행동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엇던 거지요.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스타니스랍스키의 신체적 행동법과 열자의 무위(無爲) 사상이 만나는 접점입니다.
비내리는 날 저는 그렇게 갈매기와 놀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도착한 지도 모르고요. 아내는 50분을 산책하며 그 바닷가에 왔습니다. 아내는 갈매기와 저의 유희 장면을 5분동안 지켜보며 기다렸다고 합니다. 저는 그때서야 갈매기가 떠나간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참 영특한 갈매기입니다. 참 고마운 갈매기입니다. 갈매기는 제 아내와 임무 교대를 위해 가로등을 떠넜던 것입니다.
못다 올린 사진은 자정 이후에 올리겠습니다. 화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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