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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광한루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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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제일루(광한루 현판)
광한루원 안내문
광한루
광한루 정면
현판(호남제일루)
누각은 현재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금지. 중앙에 계관(桂觀)이란 편액이 보인다.
측면
방장정

 

광한루의 연못에는 수명 70~80년생의 잉어가 많다.
춘향사당
춘향사당
춘향사당 현판(열녀춘향사)

 

 

비석군

 

요천에서 연못으로 끌어오는 물줄기
오작교
오작교
오작교
연못가의 버드나무
70~80년생의 비단잉어
월매의 집 입구
다산 정약용 시비

광한루(廣寒樓)는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 호남 제일의 누각이다. 광한루에는 수많은 역사가 흐르고 있고, 그 역사의 중심에는 인물들이 있다. 아쉽게도 광한루는 <춘향전>에 묻혀 광한루를 최초로 세운 황희(黃喜, 1363~1452)를 비롯하여 숱한 인물들이 춘향의 치마폭에 갇힌 셈이 되었다. 그래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는 것일까(?).
  
청백리 정승으로 유명한 황희는 세종 때 무려 18년간 최장수 영의정으로 봉직했다. 그는 사후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으로 책봉됐다. 개경에서 태어나고 한양에서 생활한 황희에게 왜 남원부원군이란 군호가 붙었을까.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하려 하자 당시 이조판서 황희가 반대했다. 처음엔 교하(파주)로 유배시켰다가 태종은 너무 가깝다 하여 다시 남원으로 보냈다. 

황희는 3년간 남원에서 유배를 당하면서 6대조인 황감평(黃鑑平) 선조가 세운 서재 일재(逸齋)를 헐고 그 자리에 더 큰 규모의 누각을 세우고 그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불렀다. 

광한루는 1434년(세종 16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오늘의 이름인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광한루란 이름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虹蜺)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月宮)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정철에 의해 보수될 때 봉래 · 방장 · 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여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仙境)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38년(인조 16)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광한루의 역사를 다 기술할 이유도 없고 그런 위치에 서 있지도 않다. 다만 광한루를 최초로 건립한 황희에 대한 예우가 성춘향에 비해서 너무나 빈약하여 지적하는 것이다.

광한루원에는 춘향사당이 있다. 또 최근에는 춘향전(春香殿)을 신축하여 <춘향전(春香傳)>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춘향콘텐츠의 영화와 공연자료에 대한 정리를 깔끔하게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춘향을 스토리텔링하여 관광콘텐츠로 개발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퇴기 출신의 ‘월매(月梅) 집’을 호남 지주였던 영랑 생가처럼 웅장하게(?) 건립할 이유가 무엇인가? 판소리 집대성한 신재효의 고택보다도 더 화려한 월매의 집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씁쓰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전라북도와 남원시가 역사와 문화의 적절한 균형추를 달았으면 좋겠다. 광한루원의 한쪽 구석에 모아놓은 숱한 인물들의 쓸쓸한 비석군을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보물 제281호로 승격된 광한루 누대는 지금 문화재 보호를 위해 오를 수 없다. 조선을 이끌어온 인걸들의 편액을 직접 볼 수도 없고, 누각 위에서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누각에 오르는 모든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옥황상제가 되고 우주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으로 된다. 광한루가 보물로 지정되면서 관람객의 눈은 고물이 되었다.

광한루의 선경(仙境)은 누대에서 보아야 한다. 누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백두산 천지에 올라 천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꼴이다. 뷰포인트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데 뷰포인트를 찍으라는 격이다. 이거야 말로 주객이 전도되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핑계로 건물만 골동품처럼 보존하는 문화재 정책도 재고되어야 한다.

정약용도 광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한루에는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요천(蓼川)에서 끌어온 옛 물길처럼 지금도 광한루 연못에는 맑은 물줄기가 들어온다. 은하수를 상징하는 이 연못에 역사와 전설의 물길도 함께 들어왔으면 좋겠다. 

청백리 황희의 리더십이 생각나는 시절이다. 광한루 역사관이 생겼으면 좋겠다. 춘향전의 글로벌 콘텐츠와 함께 황희전(黃喜殿)에서 황희 정승의 이야기가 연극으로 공연되는 시절을 기대한다. 역사와 문화와 전통의 도시 남원의 위대한 부활을 염원한다. 

불등(不登) 광한루(廣寒樓)

광한루 계단에 오를 수 없네
멀리 계관(桂觀) 두 글자만 보이네

옥황상제도 될 수 없고
계수나무도 바라볼 수도 없네

사당(祠堂)에 걸리면 친일이고
향전(香殿)에 놓으면 반일이냐 

춘향의 치마폭도 넓지만
월매의 치마폭도 넓기만 하네

조선의 역사가 
두 여인의 치마폭 속에 숨었구려

요천(蓼川)의 물줄기는 흐르는데
잉어만 살찌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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