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재나 스승도 없이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모사하던 소치는 체계적인 그림 공부를 하지 못했다. 초의선사의 배려로 대흥사에 머물던 소치는 28세에 해남 녹우동(綠雨堂)을 찾아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후손 윤종민(尹鍾敏)을 만난다. 유종민은 가보(家寶)나 다름없는 <공재화첩(恭齋畫帖)>을 빌려준다. 초의선사의 소개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치에게 그림의 세계를 처음 열어준 스승은 초의였다.
1839년 봄 초의선사는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두릉(杜陵)으로 가는 길에 소치의 그림을 가지고 가 김정희에게 보인다. 추사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허련은 상경하여 추사의 집인 월성위궁(月城尉宮)에서 추사 문하의 문인화가들과 함께 체계적인 서화 수업을 받게 된다.
“화가의 삼매에서 너는 천릿길에 이제 겨우 세 걸음 옮겼다. 손끝으로 재주만 부리면 한갓 화공에 머무른다.”
“손재주가 아니고 혼이 들어가야 한다.”
추사 완당의 가혹한 개인지도로 서화에 눈을 뜬 시골뜨기 허련은 소치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실력은 한마디로 일취월장이었다.
그뿐 아니다. 완당은 소치에게 명사들을 소개한다. 문무를 겸비한 고관 신관호(申觀浩)와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權敦仁) 등이 소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소치는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작품을 그리는 특혜를 받았다.
다산의 큰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은 소치가 인간적으로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다. 정학연은 소치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으며, 소치는 유산의 인품에 크게 감복을 받았다.
소치는 이밖에도 당시의 권세가인 김흥근(金興根)의 삼계동(三溪洞) 별장에서 한 달 이상을 보냈고, 침계(枕溪) 윤정현(尹定鉉)의 집에서 그림을 감정하기도 하였다. 또 70이 넘어서는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민영익(閔泳翊)의 집에서는 해를 넘기기도 하였다.
지방의 촌부나 무명화가로 머물 뻔했던 허련의 재능을 발굴해 낸 최고의 공로자는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다. 예나 지금이나 재능이 있다고 그대로 성공하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허련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겠지만, 두 스승의 안목과 사랑, 후광 없이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제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의를 지킨 소치의 미담으로 화제를 돌린다. 인간의 진가는 항상 어려울 때 나타나는 것이다. 추사 완당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인왕산 월성위궁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러나 권력이란 추풍낙엽과 같은 것이다. 추사가 윤상도(尹尙度)의 옥좌에 연좌되어 예산 본가로 밀려났다. 추사를 찾아간 소치는 오랏줄에 묶여 의금부에 끌려가는 스승의 모습을 목도한다.
다음 해 소치는 험한 파도와 풍랑을 견디며 추사의 귀양지 제주 대정(大靜)을 찾아간다. 초라하고 왜소해진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제자는 마침내 엉엉 운다.
“이 사람 보시게. 이렇게 한가로이 있는 나에게 그대가 얻어낼 것이 있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자, 그래 초의가 보낸 차는 가지고 왔겠지?”
추사의 차 사랑은 유별났다. 초의와 추사의 우정만큼 차에 얽힌 얘기가 많다. 그걸 다 거론하자면 장편소설을 써야 한다. 지금의 내 관점은 추사와 소치의 사제지정師弟之情)에 있다.
소치는 제주에 머물면서 또다시 시서화에 대한 개인 교습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제자는 스승의 유배지 제주도를 세 번 방문하게 되었고, 스승은 깊고 깊은 예술의 경지로 제자를 안내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제주를 떠나는 제자에게 스승은 해남 우수사(右水使)로 와있는 신관호를 소개한다. 변방으로 발령을 받아 함께 대화를 나눌 지인이 없었던 신관호도 한양에서부터 이름을 익히 들었던 소치에게 푹 빠지게 된다.
39살이 되던 해 마침내 소치는 임금을 만나게 된다. 헌종(憲宗)이 추사의 제자 소치를 불렀다. 소치는 1849년 1월 15일 관복을 입고 처음으로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입궁했다. 이어 22일과 25일 연달아 어명을 받고 입궁해 왕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세 번째 입궁 때는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묶은 화첩까지 진상하게 된다. 이후 소치는 5월에도 몇 차례 더 입궁하는 영광을 누린다.
헌종은 소치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 임금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 했다. 그래서 활도 잘 쏘지 못하고 말도 잘 타지 못하는 소치를 무과에 합격시킨다. 이거 영화로 만들면 이 장면이 재미있을 거 같다. 아마도 신관호 연출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분명한 건 헌종이 소치의 합격을 강력하게 원했으며 추사의 복권과 신의로 보필한 소치에 대한 온정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과거에 붙은 소치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라는 무관 벼슬에 오른다. 그가 처음으로 왕을 만나러 입궁하던 때는 추사가 해배(解配)되어 제주에서 서울로 막 상경하려던 시점이었다.
헌종은 추사의 사면에 앞서 소치를 초청하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스승이 아끼는 제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친견(親見)하는 임금의 마음은 곧 스승 추사를 배려하는 것이었다.
소치의 세 차례에 걸친 제주행에 대한 입소문이 장안에 퍼졌다. 첫 번째 방문 때는 5개월, 두 번째는 7개월간 유배지에서 보내며 스승을 보필한 소치의 이야기가 세상에 퍼졌다. 또한, 절개와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신하가 필요했던 왕실에서는 소치의 행실을 귀감으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추사는 8년 3개월간의 인고의 세월 끝내고 서울에서 봄날을 맞는다. 한강변으로 옮긴 그의 집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이 다시 줄을 이었다. 그러나 헌종이 6월 초 갑자기 승하하면서 추사의 서울의 봄은 끝나고 만다.
철종(哲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안동 김씨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1852년 7월 추사는 다시 유배를 떠난다. 이번에 유배지는 최북단 함경도 북청이었다. 그해 12월 철종이 친정권을 행사하면서 추사는 유배에서 풀렸지만,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목도한 소치도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 진도로 내려가게 된다. 정치란 예나 지금이나 가까이하면 뜨겁고 멀리 있으면 추운 것이다. 소치는 정치를 멀리하고 대신 따뜻한 고향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운림산방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만든다.
또한, 좋은 제자가 좋은 스승을 만든다.
선생은 많아도 스승이 없는 시대.
학생은 많아도 제자가 없는 시대.
다산, 초의, 추사, 소치가 이룩한 사제지정의 교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경기도 광주에 올라가야 한다. 대학 스승 김정옥(金正玉) 교수님이 생존해 계신다. 교수님과는 지금도 카톡을 주고받고 있다.
코로나가 빨리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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