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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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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가는 입구
다산초당
현판

 

 

 

동암
관어재
보정산방
연지석가산
천일각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

 

오늘(1월12일) 일출

내 고향 삼향(三鄕)이 낳은 초의선사는 조선 최고의 천재 다산 정약용을 24세 때인 1809년 강진 다산초당에서 혜장 스님을 통해 처음 만났다. 초의는 다산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며 유서(儒書)와 시학(詩學)을 배웠다.

 

초의는 1813년 다산의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비가 내려 장삼 자락이 젖어 초당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산에게 가지 못한 초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다음과 시로 표현했다.

 

슬프도다.

이 작은 몸 하나 나에게 선인의 경거술(輕擧術)이라도 지었더라면

빗속으로 산 넘어 날아갔을 텐데.”

 

다산을 극진히 모셨던 초의의 또 다른 시가 있다.‘탁옹 선생에게 드림이란 시다. 탁옹은 다산의 별호(別號)이다.

 

  부자는 재물로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진 이는 말로써 떠나보내네.

 

  이제 선생께 하직하려 하지만

  마땅히 드릴 게 없습니다.

 

  누추한 마음 공경스럽게 펼쳐

  은자의 책상 앞에서 올리나이다.

 

  하늘이 맹자 어머니 같은 이웃을 내리셨네.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요.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네.

 

  편안히 머물 때도 항시 의로움을 생각하고

  실천에 나서면 어짊을 보였네.

 

  이미 넉넉하면서도 모자란 듯하였고

  항시 비우고 남을 포용하였네.

 

  내 이런 도를 구하기 위해 멀리 와서 정성을 드립니다.

  이제 또 헤어지는 자리에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수레가 떠나갈 때 주신 말씀은 가슴에 깊이 새기고

  또 띠에다 써두렵니다.

 

조선의 신진사대부들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초의선사의 유학적 터전은 정약용에게 받은 것이다.

 

초의선사는 다산으로부터 스승과 제자로서 유학을 배운 것만이 아니었다. 유불선(儒佛仙)에 대한 폭넓은 사상적 교류뿐만이 아니라, 우리 차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다성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다산 또한 자신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선사에 대해 스승과 제자 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존귀한 수행자로 평생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학생은 많아도 제자가 없는 이 시대, 선생은 많아도 스승이 없는 이 시대에 다산과 초의의 사제지정(師弟之精)은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의 시는 시극으로, 그들의 이야기는 스토리텔링되어 문화콘텐츠로 활용되어야 한다. 초의선사 탄생지의 무안군, 일지암이 있는 해남군 그리고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군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말로만 남도 풍류 운운하는 전라남도도 마찬가지다.

 

분명 21세기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관광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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