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왕인박사의 ‘책굴’을 소개한다.
왕인이 여덟 살 때 입문해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친 ‘문산재’와 왕인이 동료들과 담론했다는 ‘양사재’를 조금 지나면 거대한 석상이 하나 나온다. 후대인들이 왕인의 모습을 바위에 새겼다는 왕인의 석상이다.
이 석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책굴 입구가 있다.
왕인이 홀로 밤낮없이 공부했다는 이 책굴은 입구는 좁으나 들어가면 꽤 큰 공간이다. 운동 신경이 둔한 사람은 들어가기도 힘들고 나오기도 힘들다. 그러나 노력하면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왕인 유적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이 책굴이다.
왕인은 이곳에서 경서를 읽으며 도를 닦았다. 이 깊은 굴에서 인간 심연의 깊은 정신세계를 탐구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역사서에 왕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에는 신라인 최치원(崔致遠)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그는 당나라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귀국 후에 <계원필경>을 비롯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라에 최치원(崔致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왕인이 있었다. 왕인은 최치원이 태어나기 450여 년 전에 도일(渡日)하여 일본을 개명(開明)시켰다. 왕인박사가 일본에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였으며, 문자가 아니라 문화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할 때, 백제의 왕족과 귀족 약 1만 3000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고구려는 더 심하다. 고구려를 함락시킨 당나라 군사들은 고구려의 왕궁에 불을 질렀다.
그때 고구려의 왕실 서고(書庫)가 일주일 동안 탔다는 비서(祕書)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우리의 고대사와 삼국의 역사서가 그때 모두 불살라졌다. 왕인에 대한 역사 기록도 그때 다 없어진 것은 아닐까?
책굴에서 입구를 바라보면 한 줄기 빛이 보인다. 나는 이 빛을 ‘지혜의 빛’이라고 부른다. 왕인은 이 굴에서 터득한 지혜의 빛을 구림 상대포에서 도공(陶工), 와공(瓦工), 야공(冶工) 등 기술자 45명과 함께 범선 5척에 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혜의 굴’에서 나와 바위에 앉아 영암 벌판을 내려다본다.
지금은 논이지만 그때는 모두 바다였다. 왕인은 영산강의 수역(水域)인 상대포에서 학산천, 영암천을 거쳐 뱃길을 따라 남쪽으로 빠져 서해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틀어 남해안을 따라 일본으로 간 것이다.
영산강!
영산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다. 영산강 뱃길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선진문화가 그들의 의식주를 바꾸고, 일본인은 야만을 벗어난 것이다.
영산강!
미개한 왜(倭)를 일깨워 준 지혜의 뱃길이다. 그런데도 배은망덕한 일본은 이 뱃길을 역으로 타고 올라와 노략질과 전쟁을 일삼아왔다.
영산강 하구언의 공사로 지금은 뱃길이 끊겼다.
뱃길만이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도 꽉 막혔다. 한일관계는 지금 최악이다. 값싼 애국심으로 국민을 현혹하지 말고, 영산강 물길을 타고 바다를 건넜던 왕인의 지혜와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왕인은 일본인에게 메시아 같은 존재다.
그들의 어두운 눈과 아둔한 머리에 지혜의 빛을 던져주었고, 그들의 벌거벗은 맨살에 문화의 옷을 입혀 준 구세주였다. 영산(靈山) 월출산의 왕인박사 ‘책굴’에서는 지금도 지혜의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이 영암 왕인박사의 ‘지혜의 굴’에서 5분간만 명상과 성찰을 제대로 한다면 대한민국이 달라진다고 확신한다.
왕인박사가 답이다.
책굴이 교실이다.
교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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