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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금사정과 천연기념물 동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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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은 많다. 그러나 동백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는 나주 금사정이 유일하다.

 

금사정(錦社亭)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의 죽음 이후 그와 뜻을 함께했던 나주 출신 선비들 11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금강계'를 결성하고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은 정자이다.

 

금사정 안에는 금사정 제액과 더불어 김만영(金萬英)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稧序)'와 나동륜(羅東綸) '금강정중수상량문(錦江亭重修上樑文)' 나정규(羅錠奎)의 시 등이 걸려 있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우리나라 동백나무 가운데 가장 굵고 수령도 가장 오래되어 천연기념물 515호로 지정되었다.

 

이 동백나무와 금사정을 말하기에 앞서 전라도 유학자들의 계보와 성향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전라도 선비들은 처음부터 부당한 권력과 거리를 두었는데 대략 3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조선 건국과 더불어 명분 없는 왕권 탈취에 반기를 들고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키거나, 정쟁을 피해 전라도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았다.

 

두 번째는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도 많은 사대부가 남쪽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마지막으로 호남에 살면서 중앙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조선 초기부터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은 대부분 그들이거나 그들의 후손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수제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을 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그곳에서 17세의 나이에 김굉필에게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된다.

 

연산군(燕山君)을 축출하는 반정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중종(中宗)은 사림을 종용했고, 조광조는 그 핵심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왕도정치를 꿈꿨고 중종을 성인군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사림의 중심에 있던 조광조는 정쟁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4년 만에 축출을 당하고, 이때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게 된다.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다.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화순)에 유배되었다가 12월 사약을 받게 된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는 것처럼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였노라.

  밝은 태양이 아래 땅에 내리쪼여서

  거짓 없는 이내 마음 훤하게 비추리라.

 

정암은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호남사림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원래 사림의 뿌리는 충절과 의리를 숭상하는 학문적 계통이다.

 

금사정은 나주 출신 임붕(林鵬), 나일손(羅逸孫), 김구(金臼), 진이손(陳二孫), 정문손(鄭文孫)  11인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영산강변에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이름은 금강정(錦江亭)이었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의 국란으로 멸실, 수차례 중수되었고, 그 과정에서 금강결사(錦江結社)’의 뜻이 내포된 금사정(錦社亭)으로 바뀌게 되었다.

 

금사정 돌계단을 오르는 왼쪽에는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가 있다. 그분들은 그곳에 왜 동백나무를 심었을까?

 

세월이 변한다 하더라도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며 사철 푸른 동백처럼, 추운 겨울을 이기고 핏빛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그들의 정신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금사정은 나주시의 향토문화자료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금강계의 핵심인물인 승지공(承旨公) 나일손(羅逸孫)은 무안공 나자강의 손자이며, 금호공 나사침의 조부가 되신다. 그래서왕대밭에 왕대 난다다고 했던가!

 

 

 

 

 

2021년 3월 30일

 

 

 

 

금사정 동백나무는 겨울을 이겨내고 3월에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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