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일 집에만 있었습니다.
블로그 둘 올리고 김우진 선생과 차범석 선생의 일생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두 분 다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자 삼 대를 못 간다.”
우리 집안과 마찬가지로 두 분의 집안도 3대를 가지 못하고 기울어졌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두 분은 이 땅에 이름 석 자를 남기셨습니다.
한국연극의 초석을 다지신 빛나는 업적을 남기고 말입니다.
연출가는 사진을 남기고
극작가는 작품을 남깁니다.
시대가 바뀌어
연출가도 자신의 공연 작품을 남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두 분이 연출한 작품을 영상으로 볼 수 없지만,
두 분의 희곡을 공연한 작품들을 모아 언제든지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목포문학관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박제된 전시실이 아니라 창작충전소 내지는 창작발전소가 되어야 합니다.
‘김우진관’은 ‘차범석관’에 비해 자료가 빈약했습니다.
비교적 장수한 차범석과 단명한 김우진의 삶이 그러하듯 김우진관의 자료는 문학이나 희곡 자료보다는 선대의 사진 자료로 일관했습니다. 그래도 많은 육필 원고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톨스토이, 체호프, 스타니스랍스키의 박물관에서 ‘기록의 역사’ ‘보관의 역사’를 목격하며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차범석 선생이 생전에 다양한 자료들을 잘 정리해 두었다는 생각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잦은 이사 속에서도 그 정도의 자료를 보관하여 후세에 남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료 하나하나에 숨어 있는 고통과 산고의 역사를 읽어내며 자료를 대해야 합니다.
목포문학관을 거쳐 유달산 조각공원으로 수업은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작품도 좋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처럼 소설이나 희곡의 등장인물을 동상으로 만들어내고 공원으로 가꾸면 더 멋진 명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김우진과 차범석을 브랜드화하는 작업을 목포가 서둘러야 합니다. 이제 차범석의 희곡 ‘산불’이나 김우진과 윤심덕의 이야기를 공연으로 보기 위해 목포를 찾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연극인이라서가 아니라 공연예술의 생명은 ‘현장성’에 있기에, 목포에서만 볼 수 있는 공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저런 이야기로 대학원 현장수업은 ‘전망 좋은 집’으로 이어졌습니다. 중국 유학생들이 제 책과 자료들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그날 수업을 아내가 준비한 토종닭으로 ‘미각’의 훈련을 하고 마무리하였습니다.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불꽃놀이였습니다. 매주 금, 토, 일요일 밤에 평화광장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가 집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8시 15분 어김없이 불꽃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책에 있는 내용을 강의하는 교수법을 거부합니다.
학생들에게 창조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자극하는 수업을 지향합니다.
그날의 수업이 원생들에게 영원히 간직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중국 유학생들이 한국의 극작가 김우진과 차범석을 영원히 기억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학생들의 영혼이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밤하늘의 불꽃처럼 산화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내 고향 목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를 기대합니다.
'역사와 문화의 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사정과 천연기념물 동백나무 (0) | 2021.11.25 |
---|---|
목포진(木浦鎭) 역사공원에 오르며 (0) | 2021.11.17 |
김우진, 차범석 선생과의 만남 (0) | 2021.11.15 |
내 고향 미술관에서 (0) | 2021.11.15 |
무등산 규봉암 설경 (0) | 2021.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