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만호동(萬戶洞)이란 곳이 있다.
학창시절 귀가 아프게 들었는데, 왜 만호동인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60이 훨씬 넘어서야 만호동의 유래를 알았다.
그걸 모르고 목포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제 아내와 함께 목포진(木浦鎭) 역사공원에 갔다.
목포는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는데,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水軍)의 진영(鎭營)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렀다. 조선 왕조 때 각 도의 진(鎭)에 붙은 종 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439년 (세종 21년) 처음 목포진의 설치가 재가 되었으며, 성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은 1502년 (연산군 8년)으로 전해진다. 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그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 (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 되었다.
폐진 직후인 개항 당시만 해도 청사의 일부가 남아있어 무안감리서, 일본영사관 또는 역국사관 기지로 사용되다 훼손되어 유적비만이 남아있던 곳을 2014년 현재의 모습으로 일부 복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던 군사기지가 120여년만에 역사공원으로 복원돼 역사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만호동은 목포의 태동을 알리는 목포 진영의 소재지로 수군 무관 만호(萬戶)가 머물고 있었던 곳으로 광복 후 행정조직 개편에 따라 만호진(萬戶鎭)의 이름을 따서 만호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고로 목포진지(木浦鎭址)는 전라남도 목포시 만호동에 있는 목포진의 터이다.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목포 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별로 없다. 이 일대 교회나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당시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
목포역사 공원 밑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어린 시절 공부하였던 방과 집이 지금도 있다. 소년 김대중은 이곳에서 애국심과 애향심을 길렀을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다.
왜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목포진 역사공원을 제대로 복원하지 않았을까?
김대중 대통령을 무조건 반대하는 쪽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 김대중을 신격화하는 세력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역사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역사공원 구석에 닳아빠져 글씨를 알 수 없는 수군절도사 신광익과 만호 방대령의 선정비를 보면서 역사의 비애를 느낀다.
목포진 역사공원은 제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목포의 역사는 목포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본도의 수영(水營)을 목포(木浦)에 옮겨 설치하고, 목포의 병선(兵船)을 황원(黃原)의 남면(南面) 주량(周梁)에 옮겨 정박(碇泊)하게 하고, 진도(珍島)의 서면(西面) 소가포(蘇可浦)에 수영(水營)의 병선 3,4척을 매달 윤번으로 세워 정박하여 수호하게 하옵소서."
하므로, 이를 의정부·제조(諸曹)·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에 명을 내려 함께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아뢴 바에 따르심이 옳겠나이다."
하므로, 그대로 좇았다.
全羅道都巡察使鄭欽之啓: "本道水營移排于木浦, 木浦兵船移泊于黃原南面周梁, 而於珍島西面蘇可浦, 以水營兵船三四隻, 每朔輪番泊立守護。" 命下政府諸曹三軍都鎭撫同議。 僉曰: "宜從所啓。" 從之。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0월 20일 을사 7번째 기록)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신채호 선생의 말은 영원한 진리다.
역사공원을 내려오며 삼학도로 향한다.
고깃배가 도착했는지 갈매기들이 푸른 하늘을 바삐 움직인다.
오늘이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뜻깊은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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