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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서

호남 선비의 효시와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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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이 멉니다.

선조님들을 대략이나마 빨리 소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데, 좋은 사진이 계속 나타나 조상님들의 얘기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오늘은 그제의 '호랑이 장가가는 날'의 사진과 함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이성계의 입궐을 거절한 저의 6세조 나진(羅璡) 할아버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부연하자면

나진 할아버지는 나성군의 아버지이시자, 녹사공의 조부, 무안공의 증조부가 되시는 분입니다.

 

나진 할아버지는 5세조 직장공(直長公) 나원(羅源)의 아들로 고려 공민(恭愍王)왕 시절에 태어나셨습니다.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공조전서(工曹典書), 양광도 순문사(楊廣道巡問使), 판사(判事) 벼슬을 맡으시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살피는 애민(愛民) 정치를 실천하셨지요.

 

판관을 사임하고 고향인 나주로 내려가 지내시다 창왕(昌王) 원년(1389) 8월 전라도 관찰사 노고의 천거로 나주목 관내 17개 군현의 세곡(稅穀)을 수답, 보관하는 영산창(榮山倉)과 이 창을 방호하는 성벽(영산창성)을 쌓을 때 나주 판관 윤의, 전 개성 부윤 김중관, 정원부 등과 함께 공사를 감독하셨고, 그 후 공조전서가 되셨습니다.

 

나진 할아버지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제수하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취임하지 않고 나주에 은거하셨으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두고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에 비교된다고 하였답니다.

 

나진 할아버지의 묘소는 나주 송현촌(송월동)의 뒷산 묘향의 언덕에 있었으나, 송월동 일대가 나주시의 공공택지 개발부지로 편입되어 종의(宗議)를 모아 현재의 나주시 보산동(장흥골) 선영으로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묘비에는 나진 할아버지가 가선대부공조전서(嘉善大夫工曹典書)를 역임하셨다고 하나,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사이군의 절개로 이성계의 호조판서 제수를 거절했으며, 조선조에서는 출사하지 않으시고 나주에서 여생을 마치셨습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선비라 하지 않을까요!

불사이군!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할 정신입니다.

 

나진 할아버지의 묘비석은 다시 세워야 합니다.

가선대부(嘉善大夫)는 종2품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품계입니다. 호조판서를 거절했는데, 왜 조선의 가선대부란 말입니까! 고려시대의 자덕대부(資德大夫)’로 표기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저에게 문권(門權)을 맡긴다면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호남 선비의 효시(嚆矢)’

羅州羅公璡之墓

 

 

 

나주나씨 직장공파 6세조 나진( 羅璡) 묘비석
나주나씨 직장공파 6세조 나진( 羅璡) 묘소
영산창이 있었던 표지석
영산창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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