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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서

금호사(錦湖祠)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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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사 전경(나문실록에서 재촬영)
금호사 외삼문(外三門)
금호사 묘정비
금호사 묘정비
금호사 사당
금호공기적비, 소포공사적비, 나주나씨세거기적비
유연당
충렬공(나덕헌)의 부조묘(不祧廟)
충렬공사적비
의열각
금호사 내삼문(內三門)
사내에서 촬영한 외삼문 내부

금호사(錦湖祠)는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4-2에 있는 사당(祠堂)으로 금호(錦湖) 나사침(羅士沈)을 비롯한 그의 여섯 아들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우(祠宇).

 

나주시는, 금호사에 배향된 인물의 행적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금호사를 2018327일 나주시의 향토문화유산 제47호로 지정하였다.

 

금호사의 배향 인물 7인은 기묘사화, 기축옥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조선 역사의 변곡점에서 서 있다. 그들은 굳건한 선비정신과 충효를 바탕으로 가문과 나라를 지키며 호남(湖南) 사림(士林)의 표상(表象)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금호공과 그의 여섯 아들의 행적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서우(李瑞雨, 1633~1709)가 쓴 금호공의 묘갈명(墓碣銘) 마지막 부분만을 소개한다.

 

.....

 

공은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순박하며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이르렀으니 부모 형제간에 남들이 나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상을 당하여 치를 때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으며, 부모의 삼년상에 시묘살이할 때에는 전후로 한 번도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며, 제사를 모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남을 구휼해 줄 때는 어진 마음을 다하였다.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예컨대 나덕신이 통제사 이순신을 따라 노량에서 왜적을 섬멸한 일, 나덕헌이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친 일, 사신으로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 등은 충()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羅得素)3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 등은 효()이다.

 

예컨대 윤항(尹恒)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金磼)에게 시집간 나덕준의 큰딸, 수소(羅守素)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받은 일 등은 열()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剛)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효로 부모님을 섬기고 (孝於事親)

청렴으로 몸을 단속하여 (廉以律身)

의로 궁핍한 자들을 구휼하니 (義施于窮乏)

가르침이 자손들에게 행해졌도다 (敎行于子孫)

 

금호사 배향 인물 7인 중 다섯 분이 일로 주룡에 잠들어계신다.

 

오늘에야 고백하지만 나는 금호공과 여섯 아들의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츠 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금호사와 삼강문, 나주향교가 일로의 주룡마을과 연계되어 호남 선비문화와 충효열의 산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금호사는 이제 전남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관리와 그 가치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나씨 문중의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열린 역사문화 공간으로 재탄생 되어야 한다.

 

영산강은 오늘도 흐르고 있다.

 

 

* 오늘 일출 5컷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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