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룡의 역사 (1) - 무안공 나자강
“조상의 역사를 잊은 씨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러한 일념으로 나의 뿌리를 찾아 호남의 산천을 구석구석 누비고 있다. 광주에 거주할 때는 나주를 집중적으로 다녔다.
목포에 내려오면서 나는 ‘주룡나루’가 있는 무안군 일로읍에 전력을 쏟고 있다. 아니 이곳이 가까운 연유로 목포에 내려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무안군의 역사는 무안공(務安公) 나자강(羅自康)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를 왜 무안공이라고 할까?
그리고 일로 지명의 역사를 소개한다.
무안공은 이조 태종(太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로 무안현감(務安縣監)과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하였다.
초대 무안현감과 공석(空席)인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권섭(權攝)하며 나주의 서쪽 강변에 집터(家基)를 정하여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 세종 5년 무안 초대 현감 자강은 일로마을을 시찰하게 된다. 일로의 길은 노인 한 사람만이 걸을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그리하여 무안 현감 나자강이 ‘일로(一老)’라 명명했다고 무안군지(務安郡誌)는 기록하고 있다.
자강이 무안 현감 재임시에 호남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자강은 지금의 상사바위가 있는 절벽 위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된다.
기우제를 지내면서 영산강의 아름다운 산천을 목격하게 된다.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이곳 산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무안공은 풍수지리에 무척 능통한 인물이었다. 집터는 물론 산안(山眼)에 뛰어나 주룡(住龍) 적벽(赤壁)에 자주 오르면서 이 호남의 명당을 직접 점혈(點穴)하여 공의 아버지 녹사공(錄事公) 나집(羅諿)을 모시게 되었고, 본인도 이곳에 장사(葬事)지내도록 유언을 남긴다.
갈룡산 세장산 맨 위에는 나주나씨 직장공파의 8세조 녹사공의 묘소가 있다. 그 아래에 무안공의 어머니 순흥안씨(純興安氏), 그리고 9세조 무안공과 숙부인(淑夫人) 영천최씨(永川崔氏),가 주룡마을과 영산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무안공 나자강은 영산강 주룡의 역사를 열었다.
그는 후손 중에 용이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갈룡산(渴龍山)에 누워 있다.
무안공은 영산강과 주룡의 아름다운 산하(山河)를 600년 전에 인식한 혜안(慧眼)과 심미안(審美眼)의 소유자였다.
나의 사견(私見)이다.
올리지 못한 보름달 사진과 일출 사진을 올린다.
무안공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사진들을 담을 수 있었을까?
주룡을 찾는 이유 하나를 고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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