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주나씨 삼강문(三綱門)을 소개할 시점이 되었다.
이 삼강문을 통해 일로 주룡에 잠들어 계신 분들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강문은 유교 도덕(儒敎道德)의 핵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 따 온 말로서, 본시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旌閭)이며, 충효열의 표상(表象)이다.
삼강문은 고귀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다. 나씨 삼강문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씨 삼강문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나주시 남내동 15번지에, 또 하나는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 건립되어 있다.
나는 내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 응축되고 정신세계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이 삼강문의 소개를 직접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누구나 검색할 수 있는 백과사전의 소개를 그대로 옮겨 싣는다.
<나주나씨(羅州羅氏) 삼강문(三剛門)>
나씨 삼강문(羅氏三綱門)은 나사침을 비롯하여 3대에 걸친 충신 2인, 효자 2인, 열녀 4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문이다.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나사침(羅士忱, 1526~1596)은 16세 때 어머니가 병으로 위급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봉양하여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손자인 나득소(1607~1640)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나덕현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치르고 정성을 다하니 나라에서 그의 할아버지 나사침과 함께 효자로 정려 했다.
나사침의 장남 나덕명(羅德明, 1551~1610)과 6남 나덕헌(羅德憲)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종성 지방에 유배되어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충신으로 정려 되었다.
나사침의 넷째 아들인 나덕현(羅德顯)의 처와 그의 딸인 윤항의 처 나주나씨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강물에 투신하여 정절을 지켰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친가가 있는 안주성에 피신해 있다가 성이 함락되자 분신자살한 나사침의 손자 나수소의 처인 언양 김씨와, 그의 손녀인 김집의 처 나주나씨가 열녀로 정려 되었다.
나사침에 대한 명정이 있어 정문이 세워진 이후 차례로 효(孝) 열(烈)이 추가되었으며, 1779년(정조 3)과 1803년(순조 3)에 충신 나덕명 · 나덕헌이 각각 명정을 받았다. 이들 8인의 사적은 다음과 같다.
ㆍ나사침(1526~1596): 나주 출신으로 자는 중부(仲浮), 호는 금호(錦湖)이다.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봉양하여 모친의 병을 회복시켰다. 1614년(광해군 6) 임금의 명으로 ‘삼강행실도’가 증보될 때 수록되었다. 나주 금호사에 주벽으로 배향되었다. 효자 정려.
ㆍ나덕명(1551~1610): 나사침의 장남. 자는 극지, 호는 소포이다.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나주 금호사에 배향되었다. 충신 정려.
ㆍ나덕헌(1573~1640): 나사침의 여섯째 아들로 자는 헌지, 호는 장암이다.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나주 금호사에 배향되었다. 충신 정려.
ㆍ나득소(1607~?): 나사침의 손자이고 나덕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부친이 사망하자 3년간 시묘했다. 그 효성으로 인조 임금 때 명정이 내렸다. 효자 정려.
ㆍ하동정씨: 나사침의 넷째 아들 나덕현의 처이다.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자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선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ㆍ나주나씨: 나사침의 딸로 충의위 윤항의 처이다. 정유재란 때 하동 정씨와 함께 강물에 투신했다. 선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ㆍ언양김씨: 나사침의 손자 나수소의 처이다. 정묘호란 때 친가인 안주성에 피신해 있다가 성이 함락되자 분신, 자살했다. 그 열행으로 인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ㆍ나주나씨: 나사침의 둘째 아들 나덕준의 딸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 선조 임금이 열녀 정려를 내렸다.
후기
삼강문 관련 사진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최근의 것을 게재합니다.
삼강문에 소장된 8개의 정려현판(旌閭懸板)은 생략합니다.
정려비 후면의 사진은 첨단장비를 동원하지 않으면 촬영 불가능한 각도입니다. 1947년 도로건설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 약간 뒤로 옮긴 바람에 담과의 간격이 20Cm 정도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카메라만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돕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삼강문을 촬영한 당시에 내 휴대폰의 카메라에는
신기(神氣)가 붙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9월 6일 갈룡산, 망모산 두 선영 참배
9월 7일 새벽 ‘황금새’ 촬영
오후 금호사 방문, 사진 촬영
9월 8일 아침 갈룡산 묘소 참배
9월 9일‘ 왜가리의 비상’ 촬영
9월 10일 정오 나주 삼강문 촬영
오후 '호랑나비' 촬영
(이곳은 금호공 사침의 3자 금봉공(錦峰公) 덕윤(羅德潤)의 제당이 있던 곳)
그때의 사진을 다시 올려
그 기쁨과 경이를 함께 나눕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복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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