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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서

조상의 역사를 잊은 씨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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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견(異見)은 있지만, 이 말은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모토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로부터 연유되었는가?

  내 조상들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활동했으며, 이 시대에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내 조상들의 흔적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나는 내 몸에 흐르는 피와 DNA의 근원을 찾기 위해 오래전부터 조상의 역사 연구와 탐사를 계속하고 있다. ‘나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카테고리는 그 공부와 현장 탐방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나의 뿌리를 찾아서를 시작하기에 앞서 성씨의 기원과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서적과 자료에서 참고했지만, <나문족보편람(羅門族譜便覽)><나문실록(羅門實錄)>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다.

 

  ‘()’이란 동일 혈통임을 표현하는 이름으로 본관(本貫)과 함께 다른 혈족과 구별하는 데 사용되는 칭호이다. 인류가 언제부터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는 확실하지 않다.

 

  혼인제도가 없었던 모계사회에 있어서 어머니는 알 수 있어도 아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수렵경제에서 목축경제로 변하고, 다시 농업경제로 발전하게 되면서 인간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 재산의 사유화로 경제 제도에 변화를 겪게 되는 셈이다.

 

  동굴에서 함께 살다가 차차 일부일처를 중심으로 하는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힘이 센 남자가 가정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확실해지는 부계사회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혈연을 중심으로 사는 사회 집단을 씨족사회라고 한다. 같은 혈연과 같은 조상을 중심으로 살던 이 씨족사회가 점점 인구가 늘자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더 가까운 혈연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씨족 집단으로 갈라 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회생활이 점점 발달하고 복잡해지면서 인류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부족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혈연이 같은 각 씨족 집단이 서로 모여 한 사회를 만든 것이다.

 

  부족사회가 발달하여 부족국가가 되었고, 부족국가는 다른 부족국가와 통합하여 부족국가 연맹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 조상이 다른 집단이 모인 사회에서는 각각 자기 씨족을 가리키는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문자가 없던 이 시대에 각 씨족은 자기 씨족이 살던 강이나 산 이름으로 씨족의 이름을 대신했다. 이것이 성의 시작이라고 한다.

 

  성()이라는 글자를 보면 인류가 모계사회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계집 녀()에 날 생()으로 한 여자로부터 태어난 겨레붙이임을 상징하고 있다.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는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살았으므로 강()이라는 성을 붙였으며,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는 어머니가 희수(姬水)에서 살았다 하여 성을 희()라 했으며, ()임금의 어머니는 요허(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요()라는 성을 따랐다. 공교롭게도 이 모든 성에 계집 녀() 변을 사용하고 있다.

 

  출산 능력이 요구되던 모계사회에서 힘의 부계사회로 진화하면서 인류는 남자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이것이 씨()의 기원이다. 씨는 신분의 귀천을 분별했기에 귀한 사람은 씨가 있었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씨가 없고 이름만 있었다.

 

  한국의 성씨는 한자 등 중국 문물의 수입과 함께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순수비 등 금석문의 자료를 보면 신라인들은 이두식 이름을 사용하다가 7세기부터 중국의 한자식 성과 이름을 차용(借用)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성을 고() 씨로 하였고, 충신에게 극(), 중실(仲室), 소실(小室) 등의 성을 사성(賜姓)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온조왕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하여 부여(夫餘)씨를 칭하였다. 사서에 사(), (), (), (), (), (), (), ()씨 등이 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백제 개국공신 중 마려(馬藜) 등이 기록되어 있고, 사마(司馬), 수미(首彌), 조미(祖彌), 고이(古爾), 목협(木劦) 등의 성을 가진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박((()의 세 성이 왕위를 차지했으며, 유리 이사금이 사로국 6부 촌장에게 각각 이(((((() 등의 성을 하사(下賜)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大祚榮)이 대()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송막기문(松漠紀聞)에 발해의 유력한 성씨로 고(((((() 6성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개국공신 홍술(弘述), 백옥삼(白玉三), 능산(能山), 사귀(沙貴)에게 홍(), (), (), ()씨 성과 함께 중국식 이름을 부여하면서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이라는 성명을 갖게 되었다.

 

  고려 문종 9(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할 자격이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된 이후,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성과 본관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이후 족보가 보급되면서 조상을 미화하거나 성씨를 참칭(僭稱)하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 중기부터 족보 위조 등을 통해 양인들에게도 성씨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어 모든 사람이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하층민까지 확대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4,000개 이상의 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성씨(姓氏)는 한 혈통을 잇는 족속(族屬)을 일컫는 개념으로, 특정 인물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단계(單係) 혈연집단을 가리킨다. 자기 혈족과 다른 혈족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성은 원시사회부터 발생한 인류문화의 보편적 현상이다.

 

  한국의 성씨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일찍부터 한자식이지만, 중국 성씨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독자성과 결부되어 한국 고유의 특수성을 갖고 있다.

 

  한국의 성은 다른 나라와 같이 가족 전체를 표시하는 공동 호칭이 아니라, 부계혈통을 본위로 한 호칭이다. 한국인 누구나 성과 본관 그리고 이름을 갖고 있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이름은 항렬로 인해 가문의 대수를 나타낸다. 성은 본관과 결합함으로써만 자기의 혈족을 표시할 수 있다. 본관은 한 성이 속하는 시조의 발상지 명칭을 표시하는 것으로, 혈족의 계통을 표시할 때 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따라서 성만으로는 혈족을 표시할 수 없으며, 본과 성을 함께 이용해야만 비로소 동족을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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