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이야기를 '한 개인의 씨족사'로 치부하지 마시고, "호남선비의 원류를 찾아가는 여정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무안공 자강 할아버지의 부르심이 있어서 갈룡산에 다녀왔습니다.
주룡나루에 도착할 때부터 거짓말처럼 비가 멈췄습니다.
갈룡산에 올라 녹사공, 무안공, 반계공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청호지(淸胡池)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청호지는 갈룡산 앞에 있는 저수지입니다. 가뭄이 들 때도 물이 마른 적이 없고, 지금까지 인명사고는 물론, 단 한 마리의 동물도 빠져 죽은 적이 없는 저수지라고 합니다.
주룡마을과 망모산에도 다녀왔습니다.
금호공 할아버지는 물론 그 후손들의 묘소도 차분하게 살폈습니다.
오늘의 가장 큰 소득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과 우리 선조들이 사돈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안공 할아버지의 묘갈명을 세심하게 다시 살피다가 발견한 일입니다.
요약하면 무안공의 손자,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역임한 나성손(羅誠孫) 선조의 따님이 정암 선생의 숙부 청백리(淸白吏) 조원기(趙元紀)의 정실부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부언하면 무안공의 증손녀가 우리나라 유학의 우두머리인 조광조의 숙모가 되는 셈이죠.
정암의 숙부 조원기(趙元紀)는 중종(中宗) 때 그런 막강한 승정원의 동부승지를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승정원은 지금 청와대 비서실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이나 서류는 모두 승정원을 거쳐야 했고, 임금의 명도 승정원을 통해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그 승정원에는 정3품 당상관 이상의 승지 여섯 명이 각각 업무를 분담하고 있었습니다.
승정원의 동부승지를 지낸 문절공 조원기의 밥상에는 늘 소금과 나물과 오이뿐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를 안타깝게 생각한 벗이나 친척들이 먹을 것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조금이라도 의(義)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면 반드시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광조에게 숙부 조원기가 보냈던 편지 하나 소개합니다.
태생이 강직했던 조광조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던 문절공 조원기는 조카에게 이렇게 타일렀다고 합니다.
사람이 새처럼 저 혼자서만 하늘 위로 날아가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짐승처럼 저 혼자만 산속의 굴에 들어가 숨어 살 수도 없다.
(凡人群居天之中 不可以高飛遠走 則必須小同於俗庶 免爲所嫉)
“조광조는 너무나 곧은 사람이었기에 일찍 부러진 표본이었다.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의 기질이 꼭 그랬다. 사람들은 그를 곧은 선비의 상징으로 여겼다.”
청백리 조원기와 곧은 선비 조광조의 선비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무안공 할아버지가 호출을 내리셨을까요?
어쨌든 저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끌려 오늘 새벽 갈룡산을 찾았습니다.
내일 수원에서 문중 이사회가 열립니다.
선조들의 선비정신과 충효정신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길 기원합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 관련 사진과 이야기는 나중에 소개합니다.
오늘 한양조씨, 나주나씨 두 족보를 뒤지다가 블로그가 늦어졌습니다.
오늘 사진 올립니다.
멋진 휴일 되세요!
'나의 뿌리를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룡산(渴龍山) 설경 (0) | 2021.12.31 |
---|---|
나는 누구로부터 태어났는가? (0) | 2021.12.11 |
내가 사랑하는 계절 (0) | 2021.11.23 |
호남 선비의 효시와 무지개 (0) | 2021.11.12 |
무안공의 조부 나성군(羅城君) (0) | 2021.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