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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송암(松巖) 나위소(羅緯素)와 강호구가(江湖九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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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영산강과 가야산

 
강호구가(江湖九歌)
니위소(羅緯素)
 
- 제5수 -
달 밝고 바람 잔잔하니 물결이 비단 일다
단정(短艇)을 빗기 놓아 오락가락 하는 흥(興)을
백구(白鷗)야 하 즐겨 마라 세상(世上) 알가 하노라
 
(달 밝고 바람자니 물결이 비단이라
작은 배에 비스듬히 누워 유유자적하는 흥을
갈매기야 너무 즐겨 말아라 세상 사람들이 알까 두렵다.)

지금의 영산강은 옛 모습과 다르다.

 
광주시립극단 예술감독을 마치고 목포로 낙향하기 전에 나주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주는 역사적으로 마한의 심장이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천년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꼭 그건 만은 아니다. 나주나씨의 관향(貫鄕)인 나주에는 내 선조들의 선영이 있고 선조들의 역사적 유적이 수두룩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주나씨 없는 나주 없고, 나주나씨 빼고는 나주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 지역에서 마지막 생을 살고 싶었다. 처음부터 택촌마을 근처의 전세 아파트를 찾았다. 장소는 마음에 들었는데, 큰 평수가 없고 가장 넓은 공간이 20평 아파트였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보관하려면 최소한 30평은 넘어야 했다.
 
그렇다고 두 채의 아파트를 계약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지금의 목포로 터전을 잡았다. 영산강과 목포 바다가 동시에 보이는 지금의 전망 좋은 곳에서 10분이면 무안공을 비롯한 역대의 조상님들 유택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서론이 길어졌다. 필자가 나주에서 점찍어둔 장소 근처에 옛날에 수운정(岫雲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가야산을 마주 보는 영산강 변에 송암 나위소(羅緯素) 할아버지가 세운 정자였다. 니위소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史草)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의 저자이며 정개청(鄭介淸)의 문인이었다.  
 
송암은 71세에 관직을 은퇴한 후, 택촌마을의 수운정에서 15년간을 기거했다. 옛 기록을 보면 수운정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어찌나 좋은지 시인 묵객들이 선경(仙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정자 이름은 중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운무심이출수(雲無心而出峀,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른다.)”의 시구에서 따왔다.
 
<강호구가(江湖九歌)>는 조선 후기에 나위소가  지은 시조로 모두 9수이다.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암(松巖)이다. 오랜 관직을 거쳤으나 말년에는 향리로 돌아와 1651년(효종 2)에 세운 수운정(岫雲亭)에서 지냈다. 이 작품은 수운정의 강호(자연) 생활에서 느낀 물외한정(物外閑情), 세상 밖 자연의 한가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어떤가. 총 9수 중에서 한 수만 보아도 작가의 강호한정(江湖 閑情)을 이해할 것이다. 필자가 영산강을 좋아하고 나주 택촌마을을 점지했던 이유를 알겠는가. <강호구가>는 바로 그 영산강에서의 자연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가야산

송암은 같은 남인(南人)이며 5년 연하인 고산 윤선도(尹善道)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는데, 이 점에서 그의 강호생활은 윤선도의 어부생활과 좋은 비교가 되며, 〈강호구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며 대학입시 학력고사의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앞으로 송암의 <강호구가>를 본격적으로 해설과 더불어 소개할 예정이며, 그의 문학적, 역사적 발자취를 탐색할 계획이다. 무안공의 후예이며 금호공의 손자인 송암공의 후손들은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호남 최고의 부호 송암의 손자들은 이만석(二萬石)꾼이 둘이나 있었고 영남의 명문가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무신정변에 깊숙하게 관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송암의 사후 일이다.
 
수운정은 지금 없다. 그러나 장암의 시와 시조 그리고 그의 글들은 살아있다. 글의 힘이다.  

영산강은 오늘도 흐르고 있다.

송엄 나위소의 묘소

「나위소 신도비」(羅緯素 神道碑)는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2006년 12월 30일 지정되었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碑)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신도비는 조선시대 왕릉의 신도비로서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와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또, 사대부의 신도비는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자들의 묘 앞에 큰 비를 세우고 이수(螭首)·귀부(龜趺)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적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
 
나위소의 원 신도비는 17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 신도비는 1716년 숙종 42년 중수되었다. 높이 140cm, 폭 63cm, 두께 22cm의 크기이며, 귀부와 이수가 “수려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기법”을 썼다고 평가된다. 신도비의 비문과 비의 글씨는 의정부 우의정 미수 허목(許穆; 1595년~1682년)이 썼으며, 송암 나위소의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신도비는 나주시 삼영동 나주나씨 집성촌 나위소 묘역 입구에 위치한다.

나위소 신도비
묘소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석양
가야산과 영산강의 석양

 

목포 영산강 사진 추가하였습니다.

태양의 일기

요즘은날마다 '그곳'에 갑니다.일출과 일몰이 한 자리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 또 있을까요?그곳에 자주 가다보니사진이 많이 밀렸습니다.그렇다고날마다 일출과 일몰 사진만 올릴 수

nsangman.tistory.com

 

영산강과 가야산
나위소 신도비와 묘소
2025. 1. 24. 오전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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