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날인 어제 전남 장흥에 있는 해동사(海東祠)를 다녀왔다. 해동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안중근 의사와 연관이 없는 장흥에서 어떻게 안중근의 사당을 세우게 되었을까.
해동사가 있는 뒤쪽에는 만수사(萬壽祠)라는 사당이 있다. 장흥 죽산(竹山) 안씨 문중의 사당이다. 1955년 장흥 죽산 안씨 문중과 장흥 지역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순흥(順興)안씨인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사당을 짓고 영정과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문중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나라에서 비록 같은 뿌리이지만 다른 문중의 인물을 모시는 사당을 짓는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아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지은 해동사의 신실은 사방 한 칸의 규모였다. 1996~2000년 만수사 중수와 함께 해동사도 중건했다. 사우(祠宇)에는 이승만 대통령 글씨로 알려진 '해동명월(海東明月)'이 전해 온다. 내부에는 안 의사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안중근 의사의 친필 글씨 3점의 영인본이 액자로 걸려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여섯 차례의 재판을 거쳐 1910년 2월 14일 사형 언도를 받고 3월 26일 중국 여순(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장흥군이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이기도 한 해동사 일대를 추모 공간으로 새롭게 꾸몄다. ‘안중근 의사 역사문화자원 개발사업’으로 7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해동사 주변에 애국 탐방로 등의 기반시설 조성을 완료하였다.
사형을 선고받은 날인데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나 이전에 방명록에 기록을 남긴 이가 딱 한 사람이었다. 거리가 멀어서일까. 새롭게 지은 추모관의 내부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 추모 역사관 및 전시물 등의 다양한 콘텐츠가 개발되어 전국 학생들의 체험학습은 물론 온 국민의 역사 교육·체험의 장으로 적극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100년 전과 지금이 현저하게 다름을 절감한다.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이 미래사회로 이어지길 간절하게 염원해 본다.
내부에 의사의 영정과 위패가 보인다. 해동명월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오른쪽 벽에 걸린 괘종시계. 시계는 9시 30분에 멈춰 있는데, 이는 1909년 10월 26일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시각이다. 하얼빈 역에도 9시 30분에 멈춰진 시계가 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의 26대 후손입니다. 만수사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과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관련하여 만수사와 해동사, 죽산 안씨와 순흥 안씨의 이야기들은 의사의 순국일에 맞춰 다시 쓸 예정입니다.
못 다 올린 사진도 그때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청주 김씨의 사당 동백정 앞에서 담은 사진 두 컷 올립니다. 오늘도 멋진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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