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에서 돌아온 다음 날 고하도 목화체험장에 다녀왔다. 고하도는 19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육지면(목화) 의 재배에 성공하고 전국에 목화 보급이 시작되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문익점은 고려말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12년(1363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원나라는 고려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고려의 왕을 갈아치우려 하였으나 문익점은 그에 응하지 않아 중국의 남쪽 지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 중 목화를 알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그 씨를 붓 뚜껑에 넣어 가지고 왔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가 재배에 성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목화재배를 모르고 있었던 시절에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삼베옷을 입고 떨고 있었으나 목화의 대량 생산을 통해 깔고 덮을 것을 마련하고, 의복의 혁명을 일으켰다.
목화에 대한 추억이 많다. 목화가 피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 ‘다래’가 열린다. 솜이 되기 전의 이 열매는 먹거리가 없던 어린 시절 우리들의 여름 간식거리였다. 개구쟁이 친구들과 저수지에 수영하러 가면서 몰래 따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래가 익어 시간이 지나면 솜이 된다. 그 솜을 무명천과 솜이불로 사용했다. 옛날에는 가난한 집안도 딸 결혼시킬 때 솜이불을 혼수품으로 보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솜이불이 한 채 있다. 밤을 새워가며 솜이불을 손수 만드셨을, 하늘에 계신 장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옛날부터 우리 고향을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불렀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의 하얀 색 필수품. 소금, 쌀, 솜을 삼백이라 불렀고, 이 세 가지의 품종이 좋았기 때문에 삼백의 고장이라고 일컸었다.
경기대 시절, 품바의 김시라 선생과 전라도 연극인들을 규합하여 ‘삼백노리배’라는 연극인 친목 단체를 만들었다. 지역주의를 경계하여 작품까지는 만들지 않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고향에 대한 옛 추억을 살리며 술을 마셨던 일이 엊그제다. 세월이 참 빠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시라 선생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분은 항상 나에게 경어를 쓰며 연극적으로 의존했다. 지금까지도 대학로를 지키는 연극인은 많지 않다. 예술을 하면 지금도 배가 고프다. 혼자 배고픈 건 감내할 수 있는데 가족을 생각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김시라 선생을 연결한 2대 품바 고수 태형이가 1년째 병상에 누워있다. 태형의 쾌유를 기원한다.
요즘은 좀처럼 목화를 볼 수 없다. 아내와 함께 가까운 거리에서 목화를 볼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갯벌은 덤이다. 그날은 갯벌도 예술이었다.
갑자기 고향의 아랫목이 생각난다. 두툼한 솜이불 깔린 아랫목에 들어가 고개만 내밀고 군고구마 먹으며 옛날 이야기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아직도 무더위는 남아있는데, 솜이불의 따뜻함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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