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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명옥헌과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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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더 큰 피해가 없기를 소망해 본다.

 

교육부 장관이 여론에 밀려 사퇴를 했다. 애초부터 인사를 잘해야 한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오죽했으면 내가 두 번이나 언급했을까! 

 

본론으로 들어간다. 명옥헌 애기를 하겠다.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명옥헌(鳴玉軒) 원림(苑林)은 조선 중엽에 도승지에 증직된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가 산천경개를 벗하며 살던 곳으로 그의 넷째아들 명중(明仲) 오이정(吳以井)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은거하면서 만든 정원이다. 오이정은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정자를 짓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주변에 배롱나무와 소나무를 심고 명옥헌(鳴玉軒)이란 정자를 지었다. 

명옥헌에는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라는 두 개의 연못이 있다. 이 두 연못에는 사각형 모양으로 그 안에는 둥근 형태의 섬이 조성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고 여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따른 것이다. 

명옥헌이란 계곡물이 흘러 위 연못(上池)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명옥헌은 단순한 거처를 넘어 시를 짓거나 후학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곡 오희도는 선조 35년(1602) 사마시와 광해군 6년(1614)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다.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모시고자 했던 효심의 발로였다. 명곡은 후산마을에 정착해 산기슭에 망재(忘齋)라는 서재를 짓고 학업에 정진했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자연을 즐겼다.

명옥헌에는‘삼고(三顧)’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오희도를 중용하기 위해 멀리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는 반정 전에 세상을 돌며 뜻을 함께할 인재들을 찾아다녔는데, 오희도의 그중의 한 명이었다.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태풍으로 인해 손상을 당했지만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많다. 늦여름에도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면서 호남 선비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것 같다. 

 

배롱나무꽃이 아름다운 곳은 많다. 명옥헌의 백일홍이 더 아름다운 건 세속의 현실 정치에 물들지 않고 낙향하여 효심을 택한 선친의 뜻을 받들어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짓고, 또 그 후손들이 그걸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감동을 넘어 고개가 숙여진다.

 

선비정신이 죽었다. 교육부장관이 그꼴이니 볼장 다봤다. 선비정신이 이 땅에 부활되어야 한다. 배롱나무꽃만 보지 말자!

 

명옥현 정면
명옥헌 상지(上池)

 

명옥헌 하지(下池)

 

 

 

 

 

 

 

 

명옥헌 뒷쪽)

 

 

명옥헌 뒸족
비에 적은 배롱나무

 

온갖 풍상을 이겨낸 배롱나무

 

 

 

명곡 오희도 선생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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