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향교에 다녀왔다. 무안 향교는 1394년(태조 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성의 남쪽에 있는 공수산(控壽山) 언덕에 설립하였는데 호랑이의 침해가 심하여 1470년(성종 1)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것을 1689년(숙종 15) 대대적으로 중수하였고, 1790년(정조 14), 1820년(순조 20), 1892년(고종 29), 1902년에 각각 보수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네 차례에 걸쳐 복원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재(東齋, 양사재),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동별실(東別室), 제기고(祭器庫), 외삼문(外三門), 협문, 고사(庫舍), 삼강문(三綱門) 등이 있다. 건축형태는 앞쪽에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다.
향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원받아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과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삭망인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한다.
무안 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교(典校) 한 분과 장의(掌議)들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어제 25분의 장의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성균관으로부터 장의 임명장을 받았다.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부활 되어야 한다. 향교의 문화적 기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외삼문의 빗장은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명륜당의 문도 활짝 열어야 한다. ‘공자 왈’이 아니라 ‘공자 정신’이 부활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선비정신’이 뿌리를 내리고 충효열의 꽃이 피어야 한다.
대성전 앞에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무안 향교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640년 이상이라고 한다. 500년 수령의 서울 성균관 은행나무보다 최소한 100년은 앞선다. 자랑스러운 내 고향 무안의 산 역사이다.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이유는 은행나무가 유교교육의 상징인 행단(杏亶)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고향 산동성의 곡부현에서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라 조선의 유학자들이 많이 심었던 나무가 은행나무다. 오래된 향교나 서원, 사당에서 커다란 은행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후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한 것이겠지만, 유교 교육기관에 은행나무가 많은 이유는 또 있다. 열매 하나에 씨 하나인 것도 은행나무의 특징. 유교에서는 씨가 여럿이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을 '충성'과 '지조'의 상징으로 보았다. 또 은행나무 자체가 너무 독해 벌레가 없는 것도 중요하다.
유교는 현실적인 학문이라 이를 통해 관리로 나아가게 되는데, 은행나무에 빗대어 출세했을 때에도 벌레가 끓는 탐관오리가 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았다. 많은 은행 열매처럼 학문의 수확을 거두라는 의미도 있고, 벌레가 생기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유생이 바른 사람으로 성장하라는 의미도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무안 향교의 가을이 기다려진다. 활짝 열린 무안 향교의 가을! 명륜당에서 스타니스랍스키와 공자가 만나는 시대를 만들고 싶다. 감성교육과 인성교육이 저 명륜당에서 이루어지는 꿈을 꾼다. 저 웅장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내 고향 무안의 그 가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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