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의 말
예술학박사 나상만
이 땅의 진정한 연기자들을 위하여
이종한 감독님이 콘스탄틴 스타니스랍스키를 이해하는 데 48년이 걸렸다고 한다. 편저자의 표현처럼 스타니스랍스키는 ‘험준한 산’이고,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은 어렵다고 한다.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이 어려운 것은 전적으로 스타니스랍스키의 책임이다. 연기예술의 바이블인 시스템을 창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다. 스타니스랍스키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저서와 유고들을 손질하며 다듬었다.
영어권에서 스타니스랍스키를 어렵게 만든 사람은 엘리자베스 햅구드 (Elizabeth Reynolds Hapgood)다. <나의 예술생애(My Life in Arts)>를 제외한 스타니스랍스키 저서들을 영어로 번역한 공로는 인정한다. <An Actor Prepares>가 1936년에 나왔고 <Building A Character>가 1949년, 그리고 <Creating A Role>이 1961년에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들은 러시아에서 발행된 저서들과 많은 차이가 있고, 용어 선택과 번역에도 문제가 있다. 확언하지만, 햅구드 자신이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모르고 번역했다는 점이다.
스타니스랍스키는‘배우의 작업’을 ‘자신에 대한 작업’과 ‘역할에 대한 작업’으로 구분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작업은 다시 ‘체험의 창조과정’과 ‘체현의 창조과정’으로 구분된다. ‘체험’의 창조과정이 <An Actor Prepares>이며 ‘체현’의 창조과정이 <Building A Character>이다. 이러한 ‘배우의 자신에 대한 작업’을 거쳐 비로소 배우는 ‘역할에 대한 작업’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을 다루는 책이 <Creating A Role>이다.
스타니스랍스키는‘배우의 작업’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시스템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쓰다 보니 길어졌고, 결국 첫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그의 생전에 활자화되지 못했다. 더구나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은 고향 러시아에서조차도 1950년대에 정립되었고, 그의 전집 8권은 1961년에 완결되었으며, 1991년 다시 9권으로 수정, 출판되었다.
이종한 감독이 열정을 쏟아 발간한 이 책은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연극을 전공한, 방송과 연극현장에서 창조작업을 거친 전문가가 영어본과 한국어본을 모두 참조하여 그 정수들을 정리, 요약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햅구드의 영역본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스타니스랍스키 최후의 결론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영어판에 수록되지 않은 스타니스랍스키의 유고들을 첨가하여 시스템의 본질인 ‘신체적 행동법’을 설명하고 있다.
배우예술은 행동의 예술이다. 연기자가 무대에서 펼치는 모든 행위는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에서의 행동은 크게 ‘내면적인 행동’과 ‘외면적인 행동’으로 구분된다. 움직이는 것만이 행동이 아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외면적 행동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아도,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하고 듣고 느끼는 것도 행동이다. 이것이 내면적 행동이다. 이 행동은 지성과 의지, 정서의 영역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있다. 무대에서의 모든 행동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문을 연다면 문을 여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환기를 시키기 위해서, 또는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대에서의 모든 행위는 내면적 동기에 의해 그 상황에 맞는 외면적 행동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핵심이며, 이것을 ‘신체적 행동법’이라고 부른다.
감수자가 한국에 도입한 스타니스랍스키 교육과정은 1) 행동의 요소 2) 신체적 행동의 기억 3) 1인 에튜드 4) 2인 에튜드(침묵 에튜드 포함)라는 ‘자신에 대한 작업’과 1) 관찰 2) 형상화를 위한 에튜드 3) 장면연기 4) 전막 공연이라는 ‘역할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스타니스랍스키 저서들의 서술 방법이 이와 다르게 저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이 책은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본질과 이론에 관한 것이며 본격적인 실습서는 아니다.
이 책이 진정한 연기자를 꿈꾸는 배우들에게 소중한 길잡이가 되길 기대한다. 이 책을 통해 연극의 위대한 스승 콘스탄틴 세르게이비치 스타니스랍스키와 더욱 친밀해지길 희망한다.
편저자 이종한 감독님의 열정과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그의 열정과 노고로 우리도 이제 스타니스랍스키의 ‘험준한 산’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종한 감독의 저서 원고 3차 수정을 마쳤다.
감수자의 글도 마무리하여 보냈다.
내 역할을 이제 끝낸 셈이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이 책이 세상에 나와 이 땅의 배우들이 스타니스랍스키의 '험준한 산'을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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