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행사를 잘 마쳤습니다.
참여한 분들의 공통적인 이야기는 "대단한 문중"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여기에도 공개합니다.
사진은 어제 올리지 않았던 일출 몇 컷과
목포에서 출발하기 전 가을, 내려오면서 차 안에서 찍었던 한 컷입니다.
우리는 태양의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그리고 조상의 고마움을 망각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조상이 없었다면
이 풍요로운 지구에서 여러분이 숨을 쉬고 있을까요?
......
어제 특강 요약해서 올립니다.
<문중(門中) 문화자원의 재탄생>
-금호사(錦湖祠)를 중심으로-
1. 지역문화진흥정책의 환경변화
1)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며 예술이 지배하는 사회다. 문화와 예술이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창조하고, 문화와 예술이 관광과 융합하여 지역경제 및 국가 경쟁력을 상승시키는 시대가 되었다.
2)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한 문재인 정부는 제2차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과 문화비전 2030정책을 수립하고 그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3) 이에 부응하여 전라남도는 제2차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2020~2024)을 수립하고 4대 추진전략을 발표한 바 있다.
* 자생력 있는 문화자원 생태계 구축
* 모두가 즐기는 생활기반 문화환경 조성
* 남도다움이 돋보이는 문화발굴과 활용
* 남도 발전을 견인하는 전남문화
4) 남도다움이 돋보이는 지역 특유의 문화발굴과 활용은 소중한 과제다. 전라남도는 문체부의 기본 틀을 바탕으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
* 지역문화 고유성 발굴 및 보존
* 남도문화의 미래 자산화
* 창조적 지역 콘텐츠. 관광산업 육성
5) 전라남도가 남도의 종가문화에 주목하고 그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이제 각 문중이 보유하고 있는 유적, 유물, 문화재에 관심을 쏟아야 할 시기다. 특히 충효열에 기반을 두고 있는 호남의 선비문화와 관련 문화재는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발굴, 장려, 지원되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미래 자산이다.
2. 시대적 배경
1)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이제 “조상의 역사를 모르는 씨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는 의미로 적용, 해석되어야 한다.
2) 우리는 이제 선현(先賢)들이나 조상의 거룩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존, 계승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한다.
3) 우리는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삼강오륜과 윤리가 실추되어 날로 심각한 사회상이 노출되고 있다.
3. 금호사의 배향 인물 소개
1) 금호 나사침은 약관 20세에 효성으로 살아생전에 정려를 받아 조세와 국가적 노역 등을 면제받은 효자의 표상이었다.
2) 큰아들 소포 나덕명은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에 곤재 정개청의 문하생으로 정여립과 가까웠을 것이라는 무고를 받아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당쟁으로 5형제 아들이 귀양을 갔으나 장자 덕명(德明)은 유배 3년 만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유배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유배에서 풀려난다.
소포는 귀향하여 국리민복을 위한 사업으로 전남 무안군 일로읍에 소재한 소포들을 축조하여 농민들에게 농지를 제공하였고, 무안에서 영암으로 가는 교통편의를 위해 소댕이나루⦁주룡나루⦁생끼미나루 등의 네 곳에 배편을 마련하여 교통이 원활하게 하였으며, 정유재란 시에는 왜적이 화순 동복에 출현함에 아버지 금호공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이들을 제압하였다.
3) 둘째 금암공 덕준(德峻)은 율곡 이이와 교류하면서 아우 덕윤과 함께 나주 대안동에 서재를 짓고, 강의계(講義契)를 조직하였다. 1589년에 당쟁으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보은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4) 셋째 금봉공 덕윤(德潤)은 스승인 곤재 정개청이 죄가 없음에도 취조 과정에서 몸이 상하여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신원복원을 위한 을미봉사소(乙未封事疏) 등을 상소하여 신원 회복에 앞장섰다.
5) 넷째 반계공 덕현(德顯)은 학문이 심대하여 반계처사로 경현서원 원장을 지냈다. 정유재란 가을에 공은 몸소 어머니를 업고 숲속으로 도망치다가 적의 무리를 만났다. 적도들이 칼을 휘두르며 앞을 가로막자 공은 어머니를 껴안고 부르짖기를 “차라리 나를 죽이지 우리 늙으신 어머니는 다치게 하지 말라”라고 외치자 적도들이 감동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효자이다” 하고는 “효자를 해치지 말라(勿害孝子)”라는 네 글자를 비단에 써 주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이후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걸 보여주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효성이 이처럼 개돼지 같은 적에게 영향을 미쳤다. 슬픈 일은 왜구를 피하면서 어머니를 모시는 사이에 아내 하동정씨와 제매들은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아내와 시누이인 나씨가 함께 치마끈으로 몸을 서로 묶어 바다에 투신하여 절개를 지키어 열부로 정려를 받았다.
5) 다섯째 아들 영암공 덕신(德愼)은 무장현감에 재임 중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명량대첩과 노량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전공이 인정되어 ‘진무원종일등공신’으로 선정되었으며 영암군수를 역임하였다.
6) 여섯째 아들 충렬공 덕헌(德憲)은 사신으로 청나라에 들어갔을 때 황제의 등극예식에 참배하지 않는 항절불굴(抗節不屈)로 그 명성을 천하에 떨쳤으며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받았다.
4. 금호사의 역사⦁문화적 자산
1) 금호사에는 호남 선비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충효열의 표상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다. 나라가 위급할 때에 충신⦁효자⦁열녀를 배출하여 2충(二忠)⦁2효(二孝)⦁4열(四烈)로 3세(世)에 8정려(八旌閭)를 받은 사례는 그 유래를 동서고금에도 찾을 수 없다. 금호 나사침과 그 후손들은 충⦁효의 명문으로 위기극복과 구국대열의 선봉이 되어왔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2)) 충효열의 정신이 응축된 ‘금호사’를 통해 천년고도 나주의 명문 가문의 전통을 후세에 알리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다. 금호사는 이러한 호남 선비문화와 충효열의 산 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3) 충⦁효⦁예의 인성교육은 학교 교육이 담당할 수 없는 대안 교육으로, 이 시대 우리의 사명이자 시대적 요청이다.
4) 우리 금호 문중은 규장각에 있어야 할 귀중한 국보급의 고문서를 근 500년 동안 보존하고 있다.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올린 계본(啓本), 장계(狀啓)와 비변사(備邊司) 병조(兵曹),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와 주고받은 관(關) 첩정(牒呈) 등을 수록한 ‘통어영록’의 필사본은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서의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료 된다.
5) 이처럼 16세기의 문화유적이 금호공종중의 사우인 금호사를 비롯하여 나덕헌의 부조묘, 유연당, 그리고 후손들이 건립한 금호회관에 다양한 전적과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으므로 인접하고 있는 두 분의 충신과 두 분의 효자와 네 분의 열녀에게 내린 정려현판과 정려비를 소장하고 있는 삼강문과 연계하여 유교 문화의 다양성을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요건을 잘 갖추고 있다.
6) 또 최근에 발견된 효자 증숭정대부의금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통훈대부 이산현감 금호공 나사침의 정부인(貞夫人) 묘역에서 수습된 동자석과 선비석, 분청사기호 등은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문화자원으로 평가된다. 별첨과 같이, 2018년 3월 26일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47호로 지정된 이 문화재를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승격, 지정하여 후대에 영원히 보존하고 관리할 가치와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5. 소결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금호사는 전남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관리와 그 가치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나씨 문중의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열린 역사문화 공간으로 재탄생 되어야 한다.
'영산강은 흐른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산강 일출도(日出圖) (0) | 2021.11.18 |
---|---|
영산강 일출(21-11-02) (0) | 2021.11.03 |
영산강에 해 뜨네! (0) | 2021.10.29 |
영산강 억새 (0) | 2021.10.25 |
새벽을 통째로 보내네 2 (0) | 2021.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