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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의 현장

칠백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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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손님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연개소문> <토지> <압록강은 흐는다>의 이종한 감독과 출판사 사장님입니다.

 

이종한 감독이 연기교육의 바이블인 스타니스랍스키의 저서들을 요약하여 원고를 보내왔고, 제가 자문과 감수를 하기로 했었는데, 워낙 작업이 방대하여 숙제(?)를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칠백의총 자료만 올리고 설명은 안내 사진과 인터넷에 있는 내용으로 대신합니다.

 

오늘은 숙제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칠백의총 소개

 

사적 제105. 1592(선조 25) 81일 조헌(趙憲)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이 합군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818일 남은 700인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하였다.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 등이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1603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인조 12)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그 뒤 1647년 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현종 4)종용사라는 사액(賜額)4()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하였다.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하여 옆에 강당인 종용당(從容堂)도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70년 국가에서는 경역을 2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ㆍ기념관ㆍ순의탑 등을 새롭게 지어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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