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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잠일기(栢蠶日記)

100만의 능선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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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9. 3, 오전 5: 41


새벽 일찍 일어나 옥암수변공원을 거쳐 영산강 끝자락을 거닐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과 들풀들을 담았다.

계절의 변화가 하루하루 다르다. 불과 몇 도의 차이지만 놀랄 만큼 시원하다. 물론 강바람의 영향이 크다.

자전거 터미널에서 커피를 마시며 블로그 글을 쓴다.  블로그를 카톡으로 전송하는 사이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오른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아침의 여유다. 어찌나 카톡이 많이 오는지 배터리 잔량이 부족하다. 카페 2층으로 올라가 충전을 하며  급한 불을 끈다.

가을의 시원함이  귀가길까지는 지속되지 못했다. 온통 땀으로 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충전을 하는 사이에 샤워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를 손질한다. 누적 방문자수를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일로행이다.

 

옥암수변공원
영산강 끝자락
붓꽃
강 건너가 목포 평화광장

 

 

해당화

 

 

 

 

 

 

 

 

 

 

 


일로 장터에서  점심을 먹었다.  만 원짜리 백반인데 갈치와 조기를 넣은 찌게 말고도 반찬이 무려 24가지다.  

손님이 많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막걸리를 시키자  취나물이 먼저 나왔다. 막걸리와 취나물의 궁합을 서울 사람들은 모른다.

취나물 두 접시를 비울 때쯤 다른 반찬이 나왔다.  찌게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한 컷을 담았다.

참으로 풍성한 반찬이다. 막걸리를 포함한 2만 4천 원의 행복이다. 종류는 많지만 손길이 자주 가는 반찬은 하나다.  

전라도 사투리로 '기무침'이다. 양념을 했는데 게가  정말 살아 움직인다. 냉동 게장은 손도 데지 않고 '기무침'을 3번 추가했다.  마지막은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아따, 먼 기가 이렇게  맛있소!

그렇게 맛있게 점심을 먹고 막걸리 한 병을 비웠다.  그때가 오후 2시쯤이었다.

밖으로 나와 누적 방문자수를 확인하였다.  10분 단위로 기록이 갱신된다. 100만 숫자를 정확하게 맞출 수는 없다. 그런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000,030! 30명이 초과한 숫자다. 100만 명을 돌파한 순간을 그렇게  포착하였다. '백잠일기를 시작하며'를 올린 지 3년 1개월만이다.

일로장터 밥상
여주 열매
방문통계: 1,000,030명(9월 3일 오후 2시 17분 기준)
천일홍
무안공 나자강 묘소

 

무안공 할아버지의 산소에 들러 기쁜 소식을 보고드렸다. 9월 7일 토요일에 학술대회가 있다. 그날 주제발표를 하시는 나천수 박사와 함께  3주일 전에 방문했었다.

그 사이 산소에 풀이 많이 자랐다.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여기서 3년 전의 '백잠일기를 시작하며'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이유는 없다. 100만의 능선을 넘은 시점에 나를 다시 점검하는 것이다. 나와의 싸움이다. 무안공 할아버지께 약속했던 길을 제대로 걸어왔는가?

초심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사진을 담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제 그 글들을 콘텐츠로 옮기는 작업이다.

만남의 광장의 폭포

 

백잠일기(栢蠶日記) 시작하며

 

목포에 이사 온 지 3개월이 지났다.

그간 15Km 이상을 달리며 만 컷 이상의 사진을 찍었다. 핸드폰 용량이 부족하여 비슷한 영상은 지우면서 찍고 또 찍고 있다.

 

목포!

중고등학교를 목포에서 다녔다. 목포에서 넘어지면 코 닿는 삼향(三鄕) 유교리(柳橋里)에서 태어났으니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그냥 목포라고 한다.

 

목포는 항구다.!

무안현(務安縣)에 속하는 조그만 포구였던 목포가 항구도시로 개항된 지도 100년이 훨씬 지났다. 그래도 이 작은 도시가 주변의 육해(陸海) ‘촌놈들의 교육적 발판이 되어 숱한 인재들을 배출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나도 그 촌놈 중의 하나다. 그 촌놈이 전국 각지와 소위 강대국이라 일컫는 러시아, 중국, 미국에서 나름의 활동을 하다가 고향 목포로 내려왔다. 이 귀향을 낙향으로 여겼던지 지인들과 친구들이 의아해한다.

 

유교 문중(門中) 단톡방에 이렇게 신고식을 했던 것 같다.

 

저는 경기대, 미국 스타니스랍스키 연기대학 교수를 거쳐, 광주시립극단 예술감독 임기를 마치고 최근 목포로 이사했습니다.

 

앞으로 영산강을 중심으로 전라도 선비들의 이야기와 유적, 명소들을 알리고 이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목포는 영산강과 황해가 만나는 지점으로, 저는 이 강과 바다가 동시에 보이는 옥암동(玉岩洞)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영산강과 호남을 깊게 공부하면서 우리 나주 나씨(羅州羅氏) 선조들이 호남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에 서서 꿋꿋하게 살아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호남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올리고, 자랑스런 선조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목포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영산강과 서해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싶다. 그렇다. 나는 역사학자 윤명철(尹明喆) 교수의 해륙사관(海陸史觀)과 궤를 함께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반도사관(半島史觀)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의 고토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그 광활한 땅과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의 꿈이 새롭게 연결되어야 한다. 단절된 영산강과 서해는 다시 연결되어 위대한 한민족의 해륙시대가 열려야 한다. 목포는 그 중심에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영산강의 끝자락, 목포 바다가 동시에 보이는 곳으로 생거지(生居地)를 잡았다. 내 고향 삼향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남악(南岳)으로 확정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선지자적 예시에 박수를 보낸다.

 

젊은 시절 작명했던 예명(藝名) ‘선랑(仙郞)’의 덕분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하고 싶은 거 다 해봤다. 이제 백잠(栢蠶)이란 아호(雅號)로 성숙한 호남 선비의 길을 가고자 한다. 동백(冬)의 절개를 지키며 하얀 누에()처럼 이야기의 실을 풀어내겠다는 각오다.

 

백잠일기(栢蠶日記)는 그 이야기의 단편들을 모은 기록과 기억이다. 꼭 글만이 아니다. 지인들에게 설명 없이 보냈던 카톡 글과 사진도 기록과 기억의 기호가 될 것이다. 그 기호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여 언젠가 하나의 천이 되고 아름다운 옷으로 탄생하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

 

 

 

 

 

 

 

 

2024. 9. 3, 오후 6: 40
목포 부흥산에서
방문통계: 1,000,910명(9월 3일 오후 11시 55분 기준)

 
옛 사진 한 컷만 소환합니다.  무안공 할아버지가 600년 전에 점지하신 주룡나루에서 담았습니다.  참으로 신묘한 장면입니다.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 다른 능선을 향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을을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작품 - 002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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