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西銘)
장재(張載)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른다. 나는 미미한 존재로 섞여 천지(天地)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천지의 가득함을 내 몸으로 삼고 천지의 주재자를 내 본성으로 한다. 백성들은 나의 형제이고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다. 천자는 나의 하늘과 땅의 적장자(嫡長子)이고, 그의 대신들은 적장자의 재상들이다. 연세가 높은 분을 존경함은 나의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것이다. 고아와 약한 자를 사랑함은 나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은 천지와 덕이 합치된 사람이고, 현인은 그 덕이 빼어난 사람이다. 무릇 천하에 노쇠한 사람과 불구가 된 사람과 외로운 사람과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과 홀아비와 과부들은 모두 우리 형제 중에 곤란하고 고통스럽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때 그들을 잘 보살피는 것은 자식으로서 도리인 공경이다. 천명을 즐거워하여 근심하지 않음은 순수한 효성이다, 부모에 대한 도리를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仁)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흉악함을 방조하는 자는 훌륭한 인재가 아니며, 몸을 잘 실천하는 것이 오직 어진 자이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일을 잘 이어갈 수 있을 것이고, 천지의 신묘함을 연구하면 그 뜻을 잘 계승할 것이다. 방의 귀퉁이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함은 부모를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름은 부모를 섬김에 게을리 않는 것이다. 맛있는 술을 싫어함은 숭백(崇伯)의 아들이 부모님이 길러준 은혜를 생각함이요, 영재를 교육함은 영고숙(潁考叔)이 남에게 선을 베풀어 주는 것이다. 수고로움을 게을리하지 않아 기뻐함에 이른 것은 순(舜)임금의 공이요, 도망하지 않고 삶겨 죽는 형벌을 기다린 것은 진(晉)나라 태자 신생(申生)의 공손함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간 사람은 증삼(曾参)이로다! 부모의 뜻을 따름에 용감하고 명령에 순종한 사람은 백기(伯奇)로다! 부귀와 복록과 은택은 하늘이 나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시려는 것이요, 빈천과 근심 걱정은 그대를 옥처럼 갈고 연마함으로써 완성시키려는 것이니라. 나를 잘 보전하며 살아 있으면 하늘을 순히 섬기고, 죽으면 내가 편안해질 것이다.
항주 만송서원 정원에는 중국 유학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친 유학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시간에 쫓겨 전부는 촬영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관심이 많았던 장재 선생을 비롯한 몇 분의 동상을 담을 수 있었다.
오늘 소개하는 장재 선생은 송조 육현( 宋朝六賢)으로 한국의 향교에서도 배향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소개된 그의 <서명(西銘)>은 우리나라 유학의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저술이다. 송나라 시대 유학의 흐름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불교와 도교는 중세 중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유교가 지도적인 사상으로 재등장하기 위해서는 불교와 도교의 도전을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했고, 고대 유교의 통찰력을 다시 회복해야 했다. 더욱이 당의 멸망 이후 거란족·여진족·몽골족 등 북방민족의 침략은 중국의 문화적 유산을 위협했다. 개인적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문화민족으로서의 중국을 보전하기 위해서 유학자들은 유학을 살아 있는 전통으로 만들 수 있는 상징적·정신적 자원을 개발했다.
송나라(960~1279)는 군사력이 약했고 그 판도도 당보다 매우 축소되었다. 그러나 송대의 경제적 번창과 과학기술·예술 등의 문화적 발전은 비옥하였다. 당의 귀족제가 무너지고 서책과 교육의 광범위한 보급과 확산, 과거제도의 완전한 시행은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사대부를 출현시켰다. 그들은 특히 높은 학문적 소양과 사회의식, 정치적 참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송대의 탁월한 사대부로는 고전학자인 호원(胡瑗, 993~1059)과 손복(孫復, 992~1057), 개혁가인 범중엄(范仲淹, 989~1052)과 왕안석(王安石, 1021~86), 관직에 있던 문학가인 구양수(歐陽修, 1007~72)와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정치가·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86)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교육·정치·문학·역사에서 유교를 부활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교부활의 과정을 성리학 사상가들의 학통(學統)으로 살펴보면 주돈이(周敦頤, 1017~73), 소옹(邵雍, 1011~77), 장재(張載, 1020~77), 정호(程顥, 1032~85), 정이(程頤, 1033~1107)와 위대한 집대성자인 주희(朱熹, 1130~1200)로 이어진다. 그들의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로 이어져 송조 육현으로 칭송, 오늘날까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장재는 우주의 실체인 '기'(氣)의 변화에서 모든 사물과 현상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는 사람과 사물이 똑같이 '천지의 기'(天地之氣)를 받았으므로 "백성은 나의 동포(同胞)이고 사물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늘과 인간의 상호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에 대한 사상은 정호에 이르러 더욱 발전했다.
장재는 서재의 동쪽과 서쪽에 글을 써놓고 있었다. 왼편 동쪽 글을 ‘폄우(砭愚)’, 오른편 서쪽 글, 즉 서명(西銘)을 ‘정완’(訂頑)이라고 불렀다. 서명은 앉은 자리의 오른쪽에 새긴 교훈의 글, 다시 말해 좌우명 (座右銘)인 셈이다. 폄우는 ‘둔함을 바로잡는다’는 뜻이고, 정완은 ‘어리석음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서명>의 글 전체는 겨우 253자에 지나지 않는 짧은 문장이지만, <서명>에 담긴 사상적 내용은 심오하다. <서명> 주제는 ‘천지만물’과 ‘나’라는 존재와의 일체에서 얻어지는 ‘인(仁)’으로 요약된다.
양산백과 축영대가 만송서원에서 3년을 수학했다는데, 기껏 1시간 남짓 머물며 이 글을 쓴다는 만용이 부끄럽다. 기회가 된다면 만송서원에 다시 가서 경건하게 묵례(默禮)를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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