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에 대하여
새벽에 올린 ‘사이(間)의 미학’에 대한 느낌을 몇 분의 문화, 예술인들이 보내주셨다. 예술 작품에 대한 느낌은 수용자 고유의 것이므로 그 자체로 예술의 최종 목적에 도달한 셈이다. 작품은 세상에 나온 순간 작가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끔 전문가의 견해를 통해서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길수 교수님의 글을 공유하면 방문자들이 앞으로의 작품에 대해서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교수님은 독일에서 극문학과 (연극) 미학을 공부하신 평론가이시다. 국립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재직하면서 제자 양성과 연극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여셨다.
나 교수님의 <왜가리의 도약과 비상을 통한 사이 담론>, 시간, 공간, 인간, 사이로 사이를 보게 하고 사이의 신비를 발견 누리게 하는 그 오묘함, 이를 관찰, 관조하여 나의 현존의 변신 가능성에 대한 조망을 유도하여주신 나상만 교수님의 걸출한 내면연기 담론 말씀, 왜가리의 순간 움직임 하나하나의 비유로 일깨워나가심이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행복감으로 다가옵니다. 교수님 감사 감사합니다.~^^
카톡 열어봐 주심에도 고마운데, 글까지 보내주신 깊은 관심과 격려의 말씀에 고마움을 전한다. 문체부 이진식 문화정책관님, 김철리 전 국립극장 예술감독님, 중앙대 정호붕 교수님께서도 ‘사이의 미학'에 깊은 관심을 표명해 주셨다. 거듭 감사를 드린다.
예술이 이론은 아니다. 보는 사람이 좋다면 그만이다. 사이의 미학이 새로운 기록을 깰 것 같다. 잘 되는 음식점에는 뭔가가 있다.
왜가리의 도약과 비상이 나오기 전, 왜가리의 기다림이라는 과거가 있었다. 배우는 무대에 들어올 때 자신의 과거를 짊어지고 온다. 스타니스랍스키는 이걸 ‘무대 밖의 생활’이라고 부른다.
일출과 함께 영산강의 어떤 부표에 앉아있는 왜가리의 오랜 침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걸 ‘기다림’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어떤 기다림인지 말할 필요는 없다. 그건 감상하는 분의 몫이다.
기다림에 대한 왜가리의 ‘내적 행동’은 참으로 절묘했다. 그 외적 표현을 여기에 다 올릴 수는 없다. 몇 개의 ‘그림’만 싣는다. 분명한 건 외면적 행동은 내면의 외면적 표현일 뿐이다. 스타니스랍스키의 신체적 행동법을 왜가리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왜가리가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더 끈질기냐는 싸움에서 결국은 내가 이겼다. 그 왜가리가 날아간 곳은 절묘하게도 제트 보트의 천막 위였다. 그래서 그곳으로 접근했고 그 ‘도약과 비상’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어쩌면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일출을 기다렸고, 또 목포 바다의 석양을 기다린다. 왜가리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기다리며, 이름 모를 꽃의 개화를 기다린다.
오늘 왜가리의 새로운 행동을 기다리며 주변에서 담았던 사진들을 함께 올립니다. 여름을 실감합니다. 해당화 열매도 이런 여름을 위하여 날마다 태양을 기다렸나 봅니다.
여러분은 기다림의 대상이 있나요?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건강한 기다림을 기원합니다.
'오늘의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제 새벽은 시원했었네! (0) | 2022.07.14 |
---|---|
금빛 비상 (0) | 2022.07.13 |
사랑에 대한 세 개의 시선 (0) | 2022.07.09 |
왜가리의 시선 (0) | 2022.07.09 |
영산강, 새벽, 능소화 (0) | 2022.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