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일찍 부흥산에 올라 암와대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낮이 길어지면서 다시 일출은 빠르고 일몰이 늦어짐을 피부로 느낀다.
왜 인간들은 그렇게 싸워야 하는가? 일출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눈만 뜨면 총질이고 갑질이고 욕질이다. 러시아가 핵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북한이 동해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해 한반도가 바람 앞의 등불이다.
이러다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한반도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 두 권력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의 낙향까지 겹쳐 정국은 더 시끄럽다.
문명의 이기인 휴대폰은 이미 무기가 되어버렸다. 명예회복. 대장동, 청와대 이전, 의상비, 심지어 5.18까지 다시 나와 총알 없는 총탄이 인터넷과 카톡을 빨갛게 달구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장선거 출마자들의 상대방 헐뜯기가 가관이다.
참으로 불쌍한 인간들이다. 암기식 교육으로 인성교육은 물론 토론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누구를 탓하랴. 상대에 대한 배려는 없고 자기주장만이 옳다. 큰소리치는 자가 이기고 카톡 늘어지는 자가 이긴다. 말세다. 이런 말세는 없었다. 카톡이 없는 시대에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카톡은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불통과 싸움의 무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양날의 칼처럼 휴대폰의 순기능도 있다. 이렇게 편리한 물건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단 말인가! 상상도 못 할 다양한 기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그 벚나무를 찾았다. 휴대폰 저장용량을 충분하게 확보한 상태였다. 고맙게도 그 예쁜 새는 내가 도착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날 찾아왔다.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몸놀림이 부드러운 연기자를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책임감 있는 예술가를 만나보지 못했다. 이 ‘배우새’는 다양한 동태와 온갖 묘기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 배우새의 이름은‘직박구리’라는 텃새이다. 친구 세진이의 표현에 따르면 ‘삔추새’라고도 한단다. 아마도 전라도 사투리인 것 같다. 검색이 무척 어려웠는데 귀깃 적갈색 무늬로 보아 틀림없는 직박구리 새다.
하지만 나는 이 새를 ‘배우새’로 부르련다. 한자로는 ‘우조(優鳥)’, 영어로는 ‘액터 버즈(Actor Bird)’다. 러시아어까지 묻는다면 ‘악쵸르스카야 쁘찌샤 (Актерская Птица)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이지 이 새는 내가 400컷 이상의 촬영을 강행군하는 동안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완벽한 연기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나는 소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을 담을 수 있었다.
아내가 어떻게 이런 근접 촬영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나는 배우새와의 소통이라고 했다. 여기서 내가 아내에게 말했던 새와의 소통을 잠시 설명하겠다.
스타니스랍스키의 연기용어 중에 ‘교류’라는 것이 있다. 이 교류가 소통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 교류에는 3가지가 있다. 자신과의 교류, 이것은 연극에서 독백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교류이다. 무대에 없는 대상과의 교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상대역과의 교류가 있다. 그런데 이 교류는 언어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내가 배우새에게 시도했던 교류가 신체적인 교류다.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배우새가 나타날 때까지 벚나무 아래서 기다렸다. 배우새가 나타나자 그 순간부터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기다려 배우새를 안심시켰다. 내가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자 배우새는 경계를 약간 풀고 자신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배우새의 과제(Task)는 먹이를 찾아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배우새의 과제를 방해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확대 촬영을 했다. 배우새가 도망을 가면 다시 행동을 멈추고 한참을 기다렸다. 먹이를 먹어야 하는 배우새는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다시 나뭇가지에 앉는다. 나는 내가 배우새를 해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일련의 조심스런 동작과 행동을 통해 배우새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시간이 경과 되자 배우새는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배우새에게 점점 더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이 400컷 이상의 근접 촬영을 할 수 있었던 열쇠였다.
스타니스랍스키는 이 교류를 나중에 ‘신체의 상호행동’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신체적 행동을 통해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뿐이야.” 라는 내 의사를 전달하면서 배우새와 교류(소통)했던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아내가 배우새의 절반이라도 자신과 소통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소통은 상대적이며, 소통을 날마다 다하면 날마다 예술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세상이 무대라지만 날마다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가끔 예술 흉내라도 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비극은 싫다. 코미디도 싫다. 정극(正劇)이 좋다. 잔잔한 감동이 흐르는 소박한 연극이 우리 주변에 많았으면 좋겠다. 전쟁과 싸움, 모든 불화는 소통 부족해서 온다. 상대가 소통해 주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신뢰의 손길과 언어를 베풀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소통의 출발선이다.
오늘은 강의가 있는 날이다. 강의가 끝나면 나주에서 전주로 간다. 내일 오후에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과 전라북도’ 라는 주제로 전주의 지식인들과 만난다. 하루 전에 가서 여유 있게 준비할 예정이다. 특강에 참석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인 것이다. 오랜만에 아내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전주에 간다. 우리는 이렇게 소통한다.
오늘 블로그에 싣는 사진은 맛보기 작품입니다. 15컷, 20컷 연작 시리즈는 작품전에서 공개할 예정입니다.
소중한 소통의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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