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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잠일기(栢蠶日記)

초의선사와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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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초의선원
초의선원
역사박물관에서 바라본 전망
초의선원 후면 기와
조선차역사박물관
보제루 뒷면

 

초의선사기념관

 

조선차역사박물관

 

다성사(초의선사 사당)
다성사 내부

 

 

 

 

 

다선일미
세심헌 안내문
영정
유적지 앞에서

초의선사의 출생지에 대해선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왕산마을이라는 것, 또 하나는 지금의 목포시 석현동이라는 주장이다.

 

석현동은 옛날 무안군 삼향면 석현리였다. 지금은 목포시에 편입되어 석현동이 되었지만.

 

초의의 탄생지가 왕산마을이든 석현동이든 큰 문제는 없다. 두 지역이 모두 삼향면이었으니, 초의의 고향은 삼향임에 틀림없다.

 

어제 아내와 함께 유적지를 다시 방문했다.

왕산에 가자고 하면 아내는 항상 얼굴이 밝아진다. 자신의 어린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가족들은 아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모두 고향을 떠났다. 큰언니가 성남에 터를 잡아 집과 전답을 처분하여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오빠, 언니들이 모두 성남이나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는 지금 영산강의 끝자락, 목포 바다가 보이는 곳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광주에서 목포로 이사 올 때, 돼지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시골집을 원했다. 그런데 아내가 아파트에 살면서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고 했다.

 

맞는 얘기다. 여러 가지를 따져서 평생을 살 집을 구해야 한다. 그동안 여러 군데를 점찍어 놓고 고민하는 중이다. 일로의 영산강 강변, 내 고향 유교리, 그리고 아내의 왕산리도 후보지의 하나다.

 

일출을 볼 수 있는 강변이나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바닷가가 좋다. 유교리는 강도 멀고 바닷가도 아니다. 어린 시절 왕산리 마동마을의 저녁노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원동 샘골 위에 우리 고구마밭이 있었다. 일꾼이 쟁기로 고구마를 캐면 가마니에 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었다. 그때 고구마 줄기에 누워 바라보는 마동마을의 저녁노을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늘 초의선사 유적지에서 그때 보았던 그 노을을 보았다. 그때 보았던 그 노을이 지금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왕산이 좋아진다.

초의선사의 시()가 내 영혼을 흔든다.

 

초의도 어린 시절 이런 저녁노을을 보았을까?

40년 만에 고향에 잠시 와서 이런 석양을 보았을까?

 

초의는 19세에 월출산에서 일몰과 월출을 바라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고 선사의 길을 걸었다. 내가 일출과 저녁노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밝혀졌다. 내 블로그의 카테고리에 해와 달의 노래가 있는 것도 결코 우연만이 아니다.

 

선사님!

왕산이 좋은데 어떡하죠?

 

왕산에 텃밭이라도 하나 구해야 하겠다. 세 평짜리 초가라도 괜찮다. 초의선사가 말년에 살았던 세심헌(洗心軒)처럼.

 

오늘부터 다시 차를 마시기로 했다.

 

다선일미(茶禪一味).

차 마시는 것과 참선하는 것은 한가지다. 차 안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녹아있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일월일미(日月一味) 출몰일미(出沒一美)!

해와 달은 하나의 맛이고 태어남도 사라짐도 똑같은 아름다움이다.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은 나의 사진예술의 영원한 소재이며 테마이다.

 

선사가 말년에 쾌년각(快年閣)을 본떠 지었다는 세심헌(洗心軒)의 문고리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다.

 

궁궐 같은 선사의 유적지. 초의는 궁궐 같은 자신의 유적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초의는 결코 그런 호사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방문객은 오직 아내와 나뿐이다. 결코, 코로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 황홀한 저녁노을에 답이 있다.

내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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