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지 89년이 되는 해였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는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거행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물통형 폭탄에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부러졌으며, 시게미쓰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를 계기로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대의 사건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헌은“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두 아들에게 남긴 다음의 시는 참으로 비장하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 의사 하면 의거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천자문》, 《소학》, 《동몽선습》을 익혔으며, 열두 살 때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체계적으로 학문을 닦았고, 열여덟 살에는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같은 시집을 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윤봉길 의사는 올곧은 기개를 지닌 선비의 삶이 무엇인가를 터득한 시인이기도 했다. 의사가 16살에 지었다는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선비정신을 갈구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옥련환시(玉連環詩)
길이 드리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맑고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 만고에 빛나리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 속에 있으니
모두 배움을 행하는 데 있으므로 그 이름 영원하리라.
不朽聲名士氣眀(불후성명사기명)
士氣明明萬古淸(사기명명만고청)
萬古晴心都在學(만고청심도재학)
都在學行不朽聲(도재학행불후성)
나라를 사랑하는 길.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은 무엇일까?
매헌이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떤 말을 할 것인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 윤봉길 의사를 기리며
며칠 전 가슴에 담아두었던,
붉게 핀 동백꽃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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