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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잠일기(栢蠶日記)

아들에게 보내는 생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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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집
아들

 

일로 청호리 

 

 

 

녹사공 문인석

 

무안공 문인석
금호공  산소 석상
갈룡산에서 바라본 망모산

 

  오늘은 아들 인엽의 생일이다.

 

  경기대에서 연구년을 맞으면서 미국에 데리고 가 그곳에서 계속 공부를 시켰다.

  딸 인아가 초등학교 3학년, 인엽이가 5학년 때였다.

 

  인엽이는 대학원에서 범죄심리학을 공부하고, 인아는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인아는 중학교 선생을 하면서 자급자족을 하고 있지만,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고 있는 인엽이게는 아직도 생활비와 학비 일부를 보내고 있다.

 

  우리 가족이 명절을 함께 보낸 적은 꽤 오래된 것 같다. 아마도 애들이 미국에 떠나기 전이니 근 16년이 지났다.

  따로따로 명절을 맞는 애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 생일도 마찬가지다.

  뉴욕에 거주하는 인아와도 떨어져 있으니 아들은 혼자 생일을 보내야 한다.

 

  그냥 한국에서 오순도순 살아갈 걸 그랬나.

  이런 날은 후회가 들기도 한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아들에게 한국에서의 사진을 다시 촬영하여 가족 카톡에 올렸다.

  태권도 자세를 취하는 모습이다. 딸 인아도 서운해할까 봐 따로 촬영해 카톡에 올렸다.

 

  내가 애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것은 추억과 자신감이다.

 

  오늘 가족 단체방에 올린 사진이 더 있다.

  9세조 무안공 자강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 있는 문인석(文人石)이다.

 

  우리 애들은 비록 미국에 살지만, 한국말도 잘한다.

  영어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한국 역사에 대해서도 늘 공부하고 있어 고마울 뿐이다.

 

  내가 블로그를 올리고 난 후, 그걸 카톡으로 전달할 때, 1순위는 가족 카톡방이다.

  다음으로 세 동생과의 단톡방, 그리고 카톡 오는 순서대로 블로그를 소개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가족들은 우리 선조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가보진 못했지만, 사진으로나마 선조들의 발자취와 묘소를 공부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 산소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의 성묘문화가 다음 세대에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풍속과 풍습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나는 내 자녀들이 조상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우리 조상들의 벼슬에는 큰 관심이 없다.

  어떤 조상이 어떤 시대를 살면서 어떤 정신과 가치관으로 일생을 마쳤는가에 초점을 맞춰 글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 생각이다.

 

  오늘은 블로그 방문자가 4만을 돌파하는 날이다.

 

  어제 나는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응집된 금호사의 문화재 신청서를 마지막 정리하고 주룡마을에 있는 두 선영을 참배했 었다.

  다음은 어제의 일기에서 발췌한 글이다.

 

금호사의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새벽 4시쯤 마무리하였다.

밀린 숙제를 마친 셈이다.

 

잔잔하던 바람이 바다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한다.

오늘도 주룡에 가야 한다.

그 옛날 뱃사람들은 그 바람을 타고 영산포로 향했다.

 

옛날 사람들은 바람이 바뀌는 나루에서 쉬어야 한다.

다시 바람이 바뀌기 전까지는 나루와 포구에서 쉬어야 한다.

 

피곤이 밀려온다.

쉬고 싶다.

 

  - 중략 -

 

집에서 주룡까지는 넉넉잡아 12분이면 도착한다.

뱃길과 찻길의 차이만큼 세상은 변했다.

 

신청서가 저장된 USB 파일 하나만 들고 갈룡산과 주룡마을 찾았다.

 

사진을 촬영하고

세 분의 묘소 상석에만 USB를 올렸다.

 

8세조 녹사공(錄事公) 나집(羅諿)

 

녹사공 할아버지는 문예가 추출하여 일찍이 식목도감(式目都監) 녹사(錄事)를 역임하셨으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참으로 슬프고 애석하다. 그런고로 생몰(生歿)에 대한 기록이 없고, 묘갈명이나 족보상에도 선조들과 그 후손들의 소개에 그치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뛰어난 아들 자강(自康)을 두어 우리의 세계를 잇게 하셨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선조가 계시다. 나성군의 장남이자 집 할아버지의 형님이신 도감감무 설() 할아버지다. 감무공 설 할아버지는 9세조 무안공(務安公) 자강을 건실하게 훈육하시어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도록 하셨다.

 

설 할아버지는 아들이 없고 세 딸은 두셨는데, 조카인 자강을 무척 아끼시고 총애하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족보상의 기록을 보면 녹사공에게 많은 위토전(位土田)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형님 설 할아버지의 배려로 짐작된다.

 

9세조 무안공 나자강.

 

아버지 녹사공을 일로 갈룡산에 안장하고 본인도 그 밑에서 잠들어계신다.

공적에 비해 제각이 단촐하다. 제각을 관리하는 사직사는 관리인이 없어 가슴이 아프다.

 

13세조 금호공 나사침.

 

호조참판 나질(羅咥)의 셋째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여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모친의 병환을 치료해 중종(中宗)으로부터 효자정문(孝子旌門)을 받았고, 경기전 참봉, 선릉 참봉, 의금부도사, 종묘서직장, 사헌부감찰을 거쳐 니산현감(尼山縣監)을 지냈다.

 

이산에 재직할 때, 효자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현민들이 공덕비를 세워 칭송했으며, 관내를 효자와 효부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삼강행실도에는 그와 그 자손들의 충효열(忠孝烈) 정신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금호사는 금호공 사침과 그의 여섯 아들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금호사 근처와 나주 반남면에 삼강문이 둘이나 있다.

 

3대에 걸쳐서 본인을 포함 2명의 충신, 2명의 효자, 4명의 열녀를 배출하여 임금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6(六德)으로 불리는 아들 여섯을 훈육시켜 호남 명문가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혔다.

 

금호사의 주인공 금호 나사침.

 

그는 지금 일로 주룡 선산의 맨 위에 누워 계신다.

왜 시조단(始祖壇)이 있는 나주의 도선산을 마다하고 일로에 안장하도록 유언을 남기셨을까?

 

이건 내 추측이다.

나주에 기거하던 금호공은 생전에 녹사공과 무안공의 묘소를 성묘했을 것이다. 나주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일로 주룡나루를 자주 왕래하게 된다.

 

금호공은 주룡의 아름다운 자연과 산세를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고조이신 무안공의 산소를 성묘하면서 무안공과 영적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갈룡산.

 

후손 중에 용이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갈망한 무안공의 의지는 금호공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마침내 그는 가정교육을 통해 세인들이 칭송하는 여섯 아들을 호남 6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무안공의 예시를 생전에 확인한 금호공은 아들들에게 나주가 아닌 무안 일로에 자신을 안장하도록 유언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룡의 역사는 금호공의 장자 소포공 나덕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백잠일기 초(抄)

2021. 9. 27

 

  아들 인엽의 생일 선물로 이 글과 사진을 보낸다.

 

  아들과 딸이 한국에서의 추억을 항상 기억하기를 바란다.

  아들과 딸이 선조들의 충효열 정신을 알았으면 좋겠다.

  아들과 딸이 조국의 가을을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한다.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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