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나상만
추풍낙엽(醜風落葉)의 길목에서
날만 새면 새 주인공이 등장한다. 배역의 이름만 다르지 캐릭터와 상황, 스토리와 주제가 거의 비슷하다. 이건 ‘통속극’의 수준이 아니라 ‘불륜극’, 더 나아가 아르토(Antonin Artaud)의 ‘잔혹극’을 연상케 한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무대의 주인공들이,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이 인터넷 실검 순위 경쟁을 벌이며 뉴스의 주인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화제의 인물’들이 한국의 무대예술을 주도하는 ‘스타’였고 대학에서 예술교육을 담당해 왔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연극’과 ‘영화’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단독학과로 창설된 지도 어언 환갑이 되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지천명(知天命)의 연륜을 넘어 이순(耳順)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지금 대학로는 공동(空洞) 상태에 빠졌고, 개학을 앞둔 대학은 대체 강사를 찾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필자는 이 분야의 전문가로 저술과 논문으로 우리나라 연기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체계적인 연기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해 왔으며, 그 실천적 방향으로 연극교육의 바이블인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한국 도입과 정착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 왔다. 필자의 그 긴 여정은 스타니스랍스키 탄생 150주년 특집으로 월간 '한국연극'에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한국수용 소고>라는 제명으로 기술한 바 있다.
필자는 연극계의 성추문이 수면에 올라왔을 때, ‘디시인사이드’와 필자의 블로그 ‘나교수의 창’에 <‘문제적 인간 이윤택 사건’을 보면서>라는 글을 올렸다. 대학로를 멘탈 붕괴 상태로 빠트린 인물에 대한 분노보다는 많은 관객들이 연극을 경멸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의 발로에서 용기를 냈던 것이다. 그런데 예고했던 바, ‘한국성추행예술인협회’와 ‘한국성추행교수협의회’를 구성할 만큼의 많은 ‘괴물’들이 각종 성추행과 성폭력에 결부되어 그 마각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중앙본부만이 아니다. 각 지역에 지부를 구성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들이 경향각지에서 등장하고 있다. 연출가, 극작가, 배우를 망라하니 이제 ‘유희단패거리’ 극단을 창단하여 한 편의 대작을 만들 수 있는 인적 역량을 갖춘 셈이다. 더구나 그들의 막강한 문화 권력을 이용하면 빅 히트작도 나올 역량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연극계를 ‘연극영화과=성추행’ ‘연기지도=마사지’ ‘연극인=성범죄’ ‘대학교수=성폭력’이라는 등식으로 치부해 버리는 추세다. 모 대학의 ‘연극영상과’ 남자 교수 전원이 성 추문(醜聞)에 결부되어 있다고 발표된 언론기사는 이 등식을 더욱 부채질하는 휘발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문화계와 교육계에 만연된 성의식(性意識)의 결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모두’라는 단어의 위험성을 경계(警戒)한다. 필자가 아는 연극계에는 일반인의 한 달 월급도 못되는 년 수입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사회와 시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꿋꿋하게 무대를 지키는 건전한 연극인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일부 사이비 연극인들의 추태를 두고 모든 연극인을 매도할 수 없는 일이다.
남녀의 문제는 인류의 탄생 이래로 동서고금을 통해 지속되어온 여성 차별의 역사이며, 경중(輕重)은 있더라도 우리 사회 도처에 잠재되어 온 폭력과 인권에 관한 문제이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 간파한 필자는 35년 전 희곡 <초신의 밤>을 발표하였고, 이를 연극화하여 전국 순회 공연한 바 있다. 졸작 <혼자 뜨는 달>은 이를 다시 소설화한 것으로 중국과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등 중화권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성폭력의 문제를 연극적 문법과 예술적으로 승화한 작품은 희곡 <멍키열전>이다. 이 희곡은 극단 ‘제5스튜디오’에 의해 2014년 초연되었고 2017년 대구시립극단에서 <몽키열전>이란 제목으로 재창작되어 갈채를 받았다. 전 세계의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원숭이 주인공들을 재결집하여 만든 이 연극에서 필자는 ‘원숭이들을 통해 인간의 꿈과 그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신의 피조물인 인간과 모든 생명체는 신의 창조의지인 나름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약육강식의 ‘권력’과 ‘힘’의 논리 속에서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묵인’해 왔다. 이 연극의 힘이 여기에 있다.
재론하지만 필자가 지적하는 것은 한국 문화예술계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미투(Me too)’ 운동이 지나치게 문화계와 예술계 그리고 방송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 없이 자행되어 온 성의 불평등이 이 운동을 계기로 사회 각 분야에서 ‘위드유(With you)’ 정신으로 확산되어 남녀평등,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미투혁명’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한국의 언론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고발과 폭로는 사회각층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확한 취재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추측성 기사와 가십성 기사로 인해 선의의 또 다른 피해자를 양성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성폭력과 성추행의 이면(衰面)에는 무서운 ‘문화권력’의 사슬이 연결되어 있으며 독버섯 같은 한국사회의 ‘적폐’들이 은폐되어 있다.
대학과 예술현장의 성범죄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대학교수의 채용과 방법, 학위논문의 작성과 심사, 학생의 선발과 현장 진출, 문예진흥기금의 심사와 지원은 이러한 거대한 문화 권력의 입김과 야합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언론에 공개된 H대학 공연예술대학원의 교수 채용과 ‘성 조력자 의혹’을 받고 있는 신임교수의 ‘강의 배제 이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교육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무시한 채, 추악한 ‘입김’과 알량한 ‘명성’에 의존하여 ‘학문 연구’와 ‘미래 인재의 양성’이라는 대학 본연의 임무를 방기(放棄)하지 않았는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대학 당국은 대오각성(大悟覺性), 반성하기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꿈을 갖고 연극을 지망하는 미래의 예술가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 꿈과 스승을 잃고 빈 강의실에 앉아 있는 연극학도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극장을 지키는 연극배우들이 있다.
추악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醜風落葉)들을 보면서 이 땅의 참 예술인 모두에게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며 다시 한 번 스타니스랍스키의 유훈을 강조한다.
“예술 속의 자신이 아니라, 자신 속의 예술을 사랑하라”
2018. 0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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