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연기론
나상만
1. 들어가며
콘스탄틴 스타니스랍스키(К. С. Станиславский)와 함께 현대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세볼로드 에밀리에비치 메이에르홀드(В. Э. Мейерхольд)는 그의 다양한 연극 실험을 통해서 20세기의 연극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러시아의 연출가이자 연극이론가이다. 그는 40여년에 가까운 연출활동을 통해서 다양한 실험과 연구로 연극을 다시 연극적(theatrical)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생활이 아닌 예술로서의 연극”을 제안하고 “논리적인 효과보다는 미적인 효과”를 추구하였다. 그가 명명한 바, 관객이 연출가의 비전을 보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삼각형 연극’을 배격하면서 “연기자가 관객에게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나타내는” ‘직선 연극’을 제안하였다.1) 메이에르홀드의 이러한 노력은 연극을 문학의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연극 본연의 무대 공연상의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연출가의 위치를 공연작가”2)로 확대시켜 놓았다.
제임스 사이몬스(James Symons)는 그의 메이에르홀드 연구에서 “메이에르홀드는 현대연극에 관한 한 그와 동시대인들인 무용의 이사도라 던칸(Isadora Duncan), 음악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건축의 윌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등과 같이 우뚝 솟아 있다”3)고 적고 있다. 메이에르홀드는 연극에서 예리한 변화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연기, 무대동작 및 연출 분야에서 특별한 공헌을 이룩하였다. 브레히트(B. Brecht), 그로톱스키(Ежи Гртовский), 피터 브록(Peter Brook)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무대 양식과 미학의 토대가 알게 모르게 메이에르홀드로부터 영감의 원천을 제공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그의 대담하고 흥미 있는 사상의 결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최근까지도 그의 연구 가운데 많은 부분이 신비와 오해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는 스타니스랍스키의 여러 연구에 압도되는 희생물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스타니스랍스키에 대한 미국 및 서구의 오해와 편견에 비해 메이에르홀드의 정당한 평가는 관용적이다. 스타니스랍스키의 저술이 오랜 시일을 두고 번역되었고, 또한 그 번역물들이 러시아어본과 현격한 차이4)를 보이는 바람에 적지 않은 논쟁거리를 제공한 반면, 메이에르홀드는 스타니스랍스키 저술에 비해 시기상으로 뒤늦게 소개되기도 하였지만, 에드워드 브라운(Edward Brown)5), 파울 슈미트(Paul Schmidt)6), 매조리 후버(Marjorie L. Hoover)7), 제임스 사이몬스8), 조지 페드로프(Geroge Petrov)9), 로버트 리치(Robert Leach)10) 등에 의해 비교적 무난하게 이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의 작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이다. 러시아의 유능한 연극 평론가인 파벨 마르코프(П. А. Марков)는 메이에르홀드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메이에르홀드의 예술관과 연출관은 매우 복잡하고 특별하여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하기 어렵고, 메이에르홀드는 항상 마지막 순간까지 탐구를 계속하여 예측불허의 상황을 만들었다.11)
메이에르홀드의 생애, 그의 정치 개입 및 금세기 첫 30년 동안 러시아에서의 혁명적 분위기는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며 각각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의 개방화 정책과 함께 메이에르홀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12) 그러나 극심한 사회변동으로 사상적 갈등을 겪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에서 모든 학문 분야가 그렇듯 많은 부분이 신비에 쌓인 메이에르홀드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시일이 필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메이에르홀드의 연극은 철학적이며 당대 러시아의 삶과 예술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찰물이다”13)고 설파한 마르코프의 표현은 그가 예견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의 상황에서 다시 음미해 볼만한 문구임에 틀림이 없다.
한국의 지상에 메이에르홀드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놀랍게도 1920년대 말부터다. 신석연(辛石燃)의 <노국의 극단>14)을 필두로 함대훈(咸大勳)의 <노서아 극단의 전망>15)이나 <모스크바 예술좌의 걸어온 길>16), <최근의 사베트 연극>17) 등에는 스타니스랍스키와 함께 러시아 연극을 이끌고 있는 메이에르홀드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극히 단편적인 상식에 불과하겠지만 생존 인물에 대한 그 당시의 빠른 정보가 우리들을 새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연출가 홍해성(洪海星)이었다. 비록 그의 소개가 불명예스러운 표절이었지만18), 실험연극이나 아방가르드를 떠들어대는 오늘의 연출가들이나 연기자들이 60년 전의 홍해성만큼이라도 메이에르홀드와 그의 연출관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고 반문했을 때, 우리는 자숙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해서 1930년 연극작업 못지않게 그 이론적 연구나 소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의 현실은 이론과 실제는 기름과 물처럼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기존의 연구에 대한 검토도 없이 주관적 관점의 저서를 전문서처럼 출간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또한 이론가의 연구는 현장인들에게 탁상공론의 언어유희가 되어 개인의 연구실적물로 도구화된 지 오래다. 이런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대학과 현장의 단절을 낳고, 그 결과 한국 연극계는 궤도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에는 메이에르홀드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석사학위 논문만도 4편이나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문이 영어권의 자료에 의한 정리 수준의 한계성과 그의 연출방법론에 국한되어 소개하는 수준의 연구에 머무르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상황에서 스타니스랍스키의 ‘신체적 행동법’과 함께 20세기의 연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연기론’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물론 생체역학(Виомехника)에 대한 메이에르홀드 자신의 글이 영역본에 의해 중역되어 부분적인 소개가 되었지만19) 그 전체적인 윤곽이나 그 철학에 대한 연구는 그야말로 황무지에 가깝다고 하겠다. 아마도 메이에르홀드를 추종하는 연극인들에게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소위, 생체역학적 연기론으로 불리는 분야일 것이다.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은 현재 러시아의 연극대학에서 무대동작 및 신체훈련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도 부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는 신체훈련이라는 독립적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 대학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신체훈련이라는 과목을 체육이나 무용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설정이다. 이에 필자는 연기훈련의 체계화를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연기론을 소개하여 신체훈련, 더 나아가 연기훈련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메이에르홀드의 생애를 간략하게 고찰하고, 그의 연기론인 생체역학의 개발과 발전, 그리고 그 철학과 목적을 소개하여 그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2. 메이에르홀드의 생애
1874년 1월 28일(구력) 모스크바 남동쪽의 뻰자(Пенза)라는 작은 마을에서 메이에르홀드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토착 부르조아 독일계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그는 카를 테오도르 카지미르(Карл Теодор Казимир)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0) 그의 어머니는 그가 적절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늘 말하였고, 그가 피아노를 공부하도록 격려하였으며, 그의 교육 중에는 연극공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에르홀드의 고향은 유랑배우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많은 배우들은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뻰자는 비록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주요한 교역로와 인접해 있어서, 배우들이 자주 그의 집에서 접대 받은 사실과 더불어 그 도시의 부산한 분위기가 후일, 연극에 대한 메이에르홀드의 흥미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21)
메이에르홀드의 점증(漸增)하는 연극에 대한 매혹은 정치 및 사회주의 비평가들에 대한 관심과 어우러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21살이 되던 해인 1895년 8월 그는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가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는 학업보다는 발레, 오페라, 연극에 관심을 쏟았고, 여름이면 고향에 내려가 연극을 하는 등, 공연예술에 더 열성적이었다. 이러한 메이에르홀드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1896년 모스크바 음악협회의 음악연극학교(지금의 국립 러시아연극아카데미)에서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결국, 법학 공부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메이에르홀드가 그의 은사인 블라지미르 이바노비치 네미로비치-단첸코(Вл. И.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о)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는 거기서 15개 이상의 역할을 맡았고 네미로비치-단첸코는 “배우로서 메이에르홀드는 학생 같지 않게 이미 여러 경험을 갖고 있었고, 매우 빠르게 역할을 소화하며 아주 다양한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하였다”22)고 기록하고 있다. 1899년 졸업을 할 때, 메이에르홀드는 연기 부문에서 은메달을 받았는데, 이는 후일 안톤 체홉의 아내가 되는 올가 크니페르(О. Л. Книппер)와 함께 한 영광이었다.23) 같은 해에 그는 네미로비치-단첸코와 스타니스랍스키의 지도하에 새로 창단된 모스크바 예술극장(MXT, 당시의 명칭은 모스크바 인민예술극장)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24살이라는 나이에 메이에르홀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이 대표하는 모든 것의 정반대가 될 운명인 극단의 창설 멤버로서 그의 연극 경력을 시작하였다.”24)
메이에르홀드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갈매기》의 트레플레프 역을 비롯한 18개 이상의 역할을 맡아 배우로서, 때로는 조연출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는 그의 연극 스타일이 스타니스랍스키나 네미로비치-단첸코에 의해서 시행되는 사실주의 양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예술적 견해의 차이로 190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떠나게 되었다. 중요한 차이점은 연극적 관점이었지만 재정문제도 그 요인의 하나였다. 비록 메이에르홀드가 자신의 탈퇴 이유를 계약이나 급료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모스크바 신문지상에서 공개적으로 부인했지만, 이 문제가 그로 하여금 극장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연극을 떠나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그 해 가을, 메이에르홀드는 우크라이나의 헤르손(Херсон)에서 <시민극장>을 임대하고 《세자매》를 필두로 연출을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연극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때 그가 공연한 작품들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출연했거나 보아온 희곡들이었고, 공연 방식도 모방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해서 메이에르홀드와 작업했던 알렉산드르 글라드코프(Александр Гладков)는 메이에르홀드의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스타니스랍스키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면서 연출을 시작하였다. 나는 이론적으로 그의 연출 방법을 다 수용할 수 없었으나, 작업을 맡게 되자 그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 기간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출의 실제적인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모방은 젊은 예술가에게 위험한 것이 아니다.26)
1903년 여름, 자기 자신의 극단을 <신 드라마 동지들>(Тварищество новойдрамы)로 바꾸고 형식화된 연극의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려는 바램에서 상징주의 연극운동을 실험하였다. 한편 메이에르홀드의 연극에 관심을 갖고 그의 경력을 주의 깊게 추적하고 있던 스타니스랍스키는 메테르링크의 《맹인》과 《틈입자》, 《실내》 공연이 실패로 끝나자 메이에르홀드를 초청해 <연극 스튜디오>(Театр_стдия)를 개설하였다. 스타니스랍스키는 메이에르홀드를 초청한 이유에 대해 『나의 예술생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들의 차이점은, 내가 도달하거나 실현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면서 새로운 것을 향하여 노력한 반면, 메이에르홀드는 구체적인 여러 조건 및 자기 극단의 허약한 인력 때문에, 그가 실현할 수 없는 새로운 방법과 기법을 자신이 이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데 놓여 있다. 나는 메이에르홀드가 그의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연구가 당시 내 꿈 가운데 많은 것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27)
연극 스튜디오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메이에르홀드는 발레리 브류소프(В. Я. Брюсов)의 연극 이념을 받아들이고 메테르링크의《탱타질의 죽음》과 하우프트만의《슈룩과 아우》를 통해 그의 연극적 실험을 계속한다. 그러나 스타니스랍스키와 메이에르홀드가 연출가의 중요성을 주장한 반면에, 스타니스랍스키는 배우의 창조성이 연출가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메이에르홀드에게 있어서 배우는 단지 연출가를 위한 목적으로 작용할 따름이었다. 반면 스타니스랍스키는 연출가의 유일한 의무는 배우를 위하여 길을 마련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1905년의 혁명으로 연극 스튜디오에서의 실험들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자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떠나게 된다. 한편 스타니스랍스키의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적인 연극관을 갖고, 상징주의 작가와 현대 미술가, 전위 작곡가들을 초청해 자신의 극장을 급진적 예술운동의 본거지로 삼고자 했던 유명한 여배우 코미싸르쥅스카야(В. Ф. Комиссаржевская)가 티프러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메이에르홀드에게 그녀의 극장에 연출가로 초청을 하고, 메이에르홀드는 이를 수락하게 되었다. 메이에르홀드는 연극 스튜디오에서 실험했던 모든 것을 이 극장을 통해 일반에게 공개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극과 철저하게 결별하여 입센의《헤다 가블러》, 메테르링크의《베아트리스 수녀》, 알렉산드르 블록(Алексаидр Блок)의《어릿광대(Балаганчик)》 등을 연출하였는데,《헤다 가블러》는 게오르그 폭스(Georg Fuchs, 1886-1949)의 『미래의 무대』(Die Schaubuhne der Zukunft)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공연되었던 많은 전위적인 작업들이 상징주의, 혹은 인상주의 연극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메이에르홀드의 작업을 기술하지 않는 양식이었다. 메이에르홀드는 약 2년간의 연출을 통하여 러시아 연극의 ‘앙팡 테리블’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의 연구를 둘러싼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적이었으며, 계속해서 혁신가 및 창조력이 풍부한 천재로 인식되었다.
1907년 러시아 상업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황실극장의 연출가인 텔라콥스키(В. А. Теляковский)가 메이에르홀드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극장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사람을 원했고, 메이에르홀드가 그 대안이었다. 마침, 배역 문제와 배우를 인형 취급한다고 코미싸르쥅스카야와 마찰을 빚던 메이에르홀드는 그 제의를 수락하여 연출가로서 작업을 시작하여 연극 관행에 관한 그의 급진적인 사상 중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다. 그는 예전보다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괴짜라는 소리를 덜 듣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는 의문, 즉 배우와 연출가 가운데에서 연극은 누구의 영역인가? 라는 의문과 늘 씨름하였다. 이 기간 중 메이에르홀드는 연극에 대한 기고물을 출판하였는데, 그 하나가 『연극 : 그 역사와 기술』28)이었다. 그 글에서 그는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와의 결별을 개괄한 자신의 연극관을 서술하였다. 그는 관객과 배우와 함께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개발하는 새로운 연극을 예견하였다. 이러한 불신의 자발적 정지는 사실주의가 아니라 상징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메이에르홀드는 배우가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연기한다고 믿었는데, 이는 나중에 그의 생체역학 이론 및 카보틴(Cabotin), 즉 배우를 위한 훈련작업으로 발전된 개념이다. 전도유망한 이 모든 연구는 1917년 2월 27일 갑자기 끝이 났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어 전 세계 뿐만 아니라 메이에르홀드에게도 예전과 같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 러시아 인구의 80%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공공 독서물, 교회의식과 함께 연극은 대중의 자의식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극은 유희 및 오락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 충격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혁명 후 연극은 거의 전적으로 정치화되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리를 주장하는 공연의 연단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920년대 러시아 연극은 흥미가 있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열렬히 투쟁하였다. 스타니스랍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전통적인 러시아 연극, 다시 말해 정치와 유리된 연극을 지지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미래파를 추종하여 연극을 다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런 작업은 처음에는 전위예술로 일반적으로 수용되었으나, 1932년경 서구에서의 미학운동과 연계되어 평판이 좋지 않게 되었다.
혁명 후 메이에르홀드는 커튼도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상연기법과 함께 최전선으로 가서 조명이 비치는 강단 속으로 무대를 확장하였고, 텅 빈 구성주의 무대장치를 도입하였다. 그는 기법에 있어서 대단히 자극적이었고, 원시 관행 및 동양적인 관행으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하였다. 그는 자주 그 자신의 연극적인 주제에 맞게 여러 고전극을 다시 쓰고 재구성하였다.29)
그의 생애 중 여러 해에 걸쳐 메이에르홀드는 많은 철학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아피아, 바그너, 메테르링크 연극에 대한 경의와 함께 시작하여, 그는 곧 미래파 예술가의 기계미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실극장에 고용되어 있는 동안 그는 지식계급에 영합했으나 그들의 정치학을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 메이에르홀드의 정치적 연극에 대한 개입은 1918년 그가 공산당에 입당할 때 절정에 도달한 바, 공산당 입당은 수년간에 걸쳐 그가 받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인하지 못하는 결정이었다.
메이에르홀드는 연극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는데 그 감정은 당 정치보다도 강했다. 스탈린 치하 1930년대의 러시아는 당이 지시하는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는 자에게는 어떠한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었고, 메이에르홀드는 그 당시의 명령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혁신하여 새로운 연기 및 공연 스타일을 개발하였다. 때때로 그는 수용의 한계를 뛰어넘었고 점점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메이에르홀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난하는 연설을 한 후, 1939년 6월 체포되었다. 메이에르홀드가 체포된 지, 단 2주후에 그의 아파트에서는 사지가 절단된 그의 아내 시체가 발견되었다. 체포된 후, 메이에르홀드는 실종으로 기록되었고 다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시베리아에 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다른 보고서에는 그가 1942년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1940년 2월 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고 1961년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3. 생체역학의 개발과 발전
메이에르홀드를 추종하는 연극인들에게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소위 생체역학으로 불리는 분야일 것이다. 오늘날도 러시아의 연극학교에 무대동작 및 신체훈련의 형태로 남아 있는 생체역학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실험연극 단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오해를 일으켰다. 영어권에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훈련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했던 멜 고든(Mel Gordon)은 이렇게 썼다.
생체역학은 혁명 직후 메이에르홀드가 창안한 연기자 훈련 시스템이었다. 분명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구자, 혁명가, 전위예술 연출가로서 메이에르홀드의 독특한 지위 때문에 1920년대 및 1930년대, 이 시스템은 광범위한 주목을 끌었다. 신기하게도 전 생애를 통하여, 그의 변하지 않은 생체역학에 관한 메이에르홀드의 개념은 웅장하면서도 외관상으로는 온건한 것처럼 보였다. 생체역학의 정복이 배우에게 무대동작에 필요한 모든 기본적인 기술, 다시 말해 평범한 배우가 익히는 데 평생이 걸리는 기술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는 메이에르홀드 워크샾에서 생체역학에 대한 그 자신의 강의를 현대 무용인 율동체조(Eurythmics)와 동등한 지위로 격하시켰다. 명백히 역설적인 이런 태도, 메이에르홀드의 훈련 프로그램과 그의 혁명 후, 초기 연기 시스템의 유사한 연극적 토대 때문에 소비에트 및 서방 비평가들은 생체역학의 이론적 배경과 적용에 관하여 혼돈하고 있다.30)
메이에르홀드의 연기론인 생체역학은 러시아에서 혁명전 그 자신의 훈련기간 동안 시작되었다. 메이에르홀드는 비록 스타니스랍스키를 존경했지만, 그의 연극개념이나 스타니스랍스키가 주도적인 제창자 역할을 했던 자연주의 운동에는 반대했다.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러시아 연극의 주도적인 전통이었지만 메이에르홀드, 알렉산드르 블록, 에밀 베르하렌, 메테르링크의 작업을 통하여 상징주의자들도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혁명 후 혁신을 위한 방법은 분명해졌고, 메이에르홀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당시의 여러 제약에 저항하고 자기 스타일의 연극을 실험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자연주의 연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자연주의 연극은 배우가 세련되고 명백하게 고정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하도록 가르친다. 환상의 연기나 의식적으로 줄잡아 말하기 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주의 연극에서 과장된 연기를 자주 목격하는 이유이다. 자연주의 연극은 암시의 위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31)
연기, 아니 통합으로서의 연극예술은 사실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재현하는 것 이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메이에르홀드는 믿었다. 그는 연극을 정형화하고 양식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연극에서의 여러 변화는 러시아에서 메이에르홀드의 작업에 국한되지 않았다. 실은 다양한 ‘사조(主義)’가 1915년에서 1930년 사이, 전 유럽에 걸쳐 생겨났다. 그런 ‘사조’에는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및 구성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구성주의는 혁명 후 러시아에서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작업과 분명히 관계되는 운동이었다. 주시하듯이 대부분의 용어는 시각예술에서의 새로운 경향에 맨 처음 적용되었다. 비슷한 명칭이 문학 속의 여러 개혁에게도 주어졌다. 그러한 많은 명칭은 연극예술에서 빠르게 나타나고 있던 여러 변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월(移越) 효과를 가져왔다.
메이에르홀드는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생체역학 및 구성주의를 자신이 적용하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메이에르홀드의 구성주의는 “비 묘사적인 플랫폼, 경사로, 회전바퀴, 그네 및 기타 연기를 창조하기 위한 장치들의 배열과 관계가 있으며 장식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이다.32) 혁명 후기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기계시대였다. 산업에서 인간의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을 허용하는 기계의 효능과 기능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이러한 생산성, 이러한 근본을 획득하기 위해 메이에르홀드는 먼저, 그리이스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그리이스 사람들이 연극의 양식화에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느꼈다. 다음으로 그는 일본, 인도, 중국 등 동양의 연극 양식을 연구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특히, 고든 크레이그(Gordon Craig)의 글과 인형극 이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 다양한 원칙들로부터 메이에르홀드는 유행하던 문학사조와 ‘진짜 감정’에 대항하여 마임, 동작, 리듬과 같은 그 자신의 연극개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이념을 끌어들였다. 이태리의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 Arte)에 대한 메이에르홀드의 빚은 가장 크고 지속적이었다.33)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대한 메이에르홀드의 작업은 연기 스타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결과로써 성 페테르부르그에 있는 메이에르홀드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그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대한 그의 관심 때문이었다.
동작은 가장 강력한 연극적인 표현수단이다. 동작의 역할은 다른 어떤 연극적 요소보다도 더 중요하다. 대사, 의상, 조명, 윙 그리고 객석이 없더라고 배우와 그의 숙달된 동작만 남겨진다면 연극은 연극으로 남아 있게 된다. 관객은 배우의 동작을 통하여 연극의 의도를 이해한다.34)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양식뿐만 아니라 17세기 스페인 연극도 경험한 블라지미르 솔로비프(В. Н. Соловьев)는 이러한 동작의 위력에 관심이 있어, 메이에르홀드가 그의 워크샾에서 가르치는 세 개의 강좌를 개발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솔로비프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상연을 위한 공연법을 담당하였고, 일련의 막간극과 16개의 에튜드(습작극)가 연습재료로 이용되었다. 메이에르홀드는 ‘무대동작’이라는 강좌를 강의한 바, 이것이 생체역학 시스템의 기초 작업이 되었다. 메이에르홀드 스튜디오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알렉세이 그리삐치(А. Грипич)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메이에르홀드는 무대동작의 기술과 무대에서 조정된 실례의 몸짓을 가지고 시작했다. 연습은 에튜드로 전환되고, 에튜드는 다시 무언극으로 발전되었다. 예를 들어 ‘활쏘기’ 연습은 ‘사냥’이라는 에튜드를 낳게 되고, 또 계속하여 무언극으로 무대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 중 몇 개의 훈련과 에튜드들은 ‘고전’ 작품이 되었고, 나중에는 생체역학을 가르치는 데 사용되었다.35)
메이에르홀드의 문하생인 에라스트 가린(Зраст Гарин)은 1922년에 실시한 ‘활쏘기’ 연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왼손으로 활을 쥐고 있다고 상상한다. 학생이 왼쪽 어깨를 앞으로 향하며 전진한다. 학생이 표적을 발견하면 멈춰서 두 발에 균형을 유지한다. 오른손은 그의 등에 상상의 끈에 있다고 믿는 활을 뽑기 위해서 아치 모양을 만든다. 손의 움직임은 몸의 균형을 뒷발로 옮기기 위해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화살을 꺼내 활에 갖다 대고 몸의 균형을 앞발에 이동시킨다. 조준을 한다. 몸의 균형을 뒷발에 다시 옮기며 활을 당긴다. 발사함으로 끝나는데, 껑충 뛰며 소리를 지른다.36)
이 연습 장면의 그림들은 생체역학 교사가 리 스트라스버그에게 주었는데, 스트라스버그가 1934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 받은 것으로 1973년 3월에 발간된 <연극평론>에 발표되었고, 또한 같은 계열이 1974년 9월호에도 수록되었다.37) 한편 ‘돌 던지기’수업에 참여했던 영국인 앙드레 반 기셈(André Van Gyseghem>도 그 훈련법을 기록하고 있고38), 멜 고든도 20여 가지가 넘는 생체역학의 에튜드 가운데 11가지의 계열을 기술하고 있다.39) 고든의 연구에 의하면, 여자 배우들은 가벼운 셔츠와 짧은 반바지, 남자 배우들은 가벼운 셔츠와 긴 바지를 연습 중에 착용하였다. 에튜드, 혹은 연습은 다양한 무대 행동선의 형태와 신체 위치 속에서 무대동작의 원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메이에르홀드에 의하면, 이들 에튜드들은 무대 위에서 경험할지도 모르는 표현적인 상황에 대해서 배우들을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에튜드들은 아래와 같이 요약된다.
1) 원, 사각형, 삼각형에서 배우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2) 짝수, 혹은 홀수의 등장인물 수(數)의 변형이 연기 양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3) 연기자나 연기 공간의 관계는 동작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
4) 무대의 시간과 공간적 현실은 인생의 그것과 어떻게 대비될 수 있는가?
5) 동작의 여러 정지가 어떻게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가?
6) 무대 도구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7) 작은 동작 대(對) 큰 동작의 사용이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40)
이 당시에도 기계의 사용이 사실상 무한하다는 믿음이 존재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러한 생각은 메이에르홀드와 같은 많은 이론가들의 작업에 파고들었다. 그는 연기의 미학과 실제가 완벽하고, 무한한 예술상의 묘기를 제공해 주는 체계화된 일상의 수준으로 연기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러시아의 연극이 소비에트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형식의 여러 변화를 경험하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소비에트 사회의 집단화와 산업화는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진지한 희망과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희망이 처음에는 순박하고 순진했을지 모르나 세대는 전진하도록 고무되었고, 소비에트 문화는 혁명 후 몇 년 동안 급격하고 광범위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메이에르홀드의 초기 생체역학적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미국의 발명가인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W. Taylor, 1856-1915)였다. 테일러는 1900년대 초반 과학적인 경영의 연구에 책임을 맡고 있었고, 그의 연구 결과는 1910년까지는 유럽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레닌 자신도 소위 테일러주의의 옹호자였다.
테일러의 연구 결과는 기계시대의 효율에 대한 중요한 본질을 표현하였다. 그는 생산라인의 각 노동단위를 연구한 후, 노동자의 신체동작은 대단히 효율적이지 못하고 모든 공장이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불필요하고 보기 흉한 동작에 낭비하고 있어서 근육에 너무 빠른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그들의 노동 생산성을 저하시키고 있다”41)고 보고하였다. 수행되는 노동의 리듬, 그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신체동작의 유형, 기타 피로, 휴식, 회복 등과 같은 요소들을 고려하여 그는 동작경제의 연구를 발전시켰다. 테일러의 연구는 1915년 그의 사후에 인간 신체 원칙의 일곱 가지 원리로 축약되었다.
1) 손의 유연하고 지속적이고 부드러운 동작.
2) 자신의 행동을 완수하기 위해 동시에 움직이는 손.
3) 양손이 동시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서는 안 된다.
4) 팔동작은 서로 다른 대칭 방향으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5) 모든 동작은 최소량의 근육의 힘에 필요한 동작에 국한되어야 한다.
6) 근육은 대항 근육군(筋肉群)에 반대되는 정(正) 근육군을 사용하여 수축되어야 한다.
7) 대체로 율동적인 동작이 선호되어야 한다.42)
메이에르홀드는 테일러 동작경제의 이러한 원칙들에 매혹되어 소비에트 테일러주의자인 가스테프(А. К. Гастев, 1881-1941)의 작업을 통하여 이들 결과들을 더욱 연구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메이에르홀드는 그를 통하여 배우의 동작이 분석되고, 연습되고, 수행될 수 있는 경제적인 시스템을 추구하고 있었다.
1900-1930년간의 기간이 기계시대였다면, 그 시대는 또한 과학적인 혁신과 혁명의 시기이기도 했다. 생물학, 생리학, 화학, 물리학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의학 분야는 커다란 여러 변화를 목격하게 되는데 기존의 신체에 관한 지식 체계에 더 많은 부분이 부가되었다. 같은 시기에 초기 심리학 연구의 대부분은 반사학, 즉 객관심리학 분야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연구 결과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들 심리학자들은 행동이 무의식을 통하여 설명된다고 하는 여러 발견 사실에 반대하였다. 그 당시의 유명한 심리학자는 감정의 본질을 연구한 미국의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반사학 및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려는 연구를 한 벡테레프(В. М. Бехтерев, 1857-1927), 반사흥분 및 반사억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러시아의 생리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파블로프(И. П. Павлов, 1849-1936)등이다.
이러한 신과학 기저(基底)에는 외부 조건이 인간의 본성을 결정하며, 객관적으로 통제된 물리적 환경의 조작이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가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과학은 심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혹은 다시 말해 생명에 관한 것과 기계적인 것 사이에는 의미 있는 구분이 유도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43)
메이에르홀드가 그들과의 교류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이론이 혁명 후에 러시아 전역에서 과학자들 사이와 관련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회람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연극 이론가들에게 미친 반사학 연구 결과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뇌작용의 모든 표현은 근육운동으로 압축될 수 있다. 여러 감정은 강화된 반사작용이다. 여러 가지 사고는 단지 반사작용일 뿐이다. 따라서 반사행동은 무의식적이든, 후천적이든, 근육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행위의 근본을 이룬다. 사실 ‘정신적’, ‘육체적’이라는 편리한 용어는 둘로 나눌 수 없는 현상, 다시 말해 생명의 두 가지 측면을 단순히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44) 간단히 말하면 심리학은 생리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 메이에르홀드에게는 이 점이 배우가 등장인물의 내성적, 심리적, 감정적인 부분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는 증거가 되었다. 먼저 신체적 혹은 생리적인 면을 찾게 되면 감정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는 것이다.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 이론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구성주의인 바, 구성주의는 혁신이라기보다는 생체역학의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했다. 구성주의는 시각예술에서 회화나 조각의 양식이었던 것처럼 연극의 한 양식이었다. 소비에트 연극에서 구성주의는 1922-1926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으며 상연, 연출, 무대디자인 및 연기에 관한 여러 사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연극을 공장이나 학교 교실로 보는 메이에르홀드의 유물론적 견해, 다시 말해 미리 결정된 반응(반사학)을 유도하기 위해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여러 기법(테일러주의)을 이용하는 데서 우리는 노동의 최종 생산, 즉 관객 속에서 효과를 만들어 바람직한 정신상태를 유도하는 것만을 전적으로 강조하는 연극을 보게 된다. 제한된 수의 효과와 정신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구성주의 연출가, 기사들은 단일 목표를 향하여 연극적 요소들(드라마 영역, 장면, 소품, 의상, 조명, 연기양식, 대사, 음악, 템포 등)을 자신들 마음대로 거의 무한정하게 결합하여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구성주의 연출가는 서로 다른 각각의 일에 접근하여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동작의 실행 방법을 위한 독특한 전략을 추구한 테일러와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작업을 하였다.45)
메이에르홀드는 구성주의 특성을 지닌 연극 배경 양식을 통하여 자신의 생체역학으로 훈련된 배우들을 교육시켰다. 그는 기사가 자신의 일에 접근하는 것과 매우 흡사하게 그의 연출에 접근하였다. 조화, 통일, 경제성을 추구하면 메이에르홀드는 반사학과 테일러주의의 원리들을 종합하여, 그것을 훈련이나 공연에서 필요한 배우들에게 적용하였다. 구성주의 기간의 메이에르홀드 연극은 서커스, 체조, 동양연극, 꼭두각시 및 인형극과 같은 순수하게 연극적인 요소들을 채용하였다. 무대는 단순화 되었고 배우에게 무대 안이나 무대 주변에서 움직이는 흥미로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평면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무대는 사실적인 재현과 거리가 멀었고,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배우가 최대한 편리하도록 무대 공간을 조직하는 것이며, 배우를 위한 ‘작업 장소’를 창조한 것이었다.46) 제임스 시몬스는 메이에르홀드의 연극 양식에 관해서 쓴 그의 책에서 배우들의 신체훈련이 어떻게 이런 무대장치와 어울리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코메디아 델라르트의 무대처럼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관객의 상상력과 협력하는 배우의 재능으로 인해, 그것은 중요한 것이 된다. 워크샾에서 배우들은 고도로 신체적이며 표현적인 전망으로 그들의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47)
1922년 그의 워크샆 세미나에서 메이에르홀드는 그의 훈련 중인 배우들에게 생체역학, 펜싱, 복싱, 곡예, 고전발레, 현대무용, 요술, 목소리, 어법과 달크로즈의 율동체조 등을 강연하였다. 생체역학은 배우훈련의 모든 측면을 결합시키는 교육적인 연결고리가 될 수 있었다. 생체역학은 배우를 하나의 연기역학 속에 있는 노동자가 되도록 준비시킬 수 있었다, “아마도 생체역학의 기초적인 원리는--- 역할에 대한 배우의 이념과 이 역할에 대한 공연 사이의 의식적인 이원론이었을 것이다.”48) 생체역학으로 훈련된 배우는 원기 왕성한 체육적, 무언극적인 훈련과는 뚜렷한 구별이 되었고 배우훈련이 새로운 형태, 다시 말해 과학과 산업 속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 ‘기계적인 기능’을 마스터한 전문가는 의미 없는 화려함과 근본적인 세심함을 쉽게 구별하기 때문에, 어떠한 과정의 전반적인 본질을 파악하고 어떠한 손동작도 그를 피해 갈 수 없다”49)고 메이에르홀드는 결론지었다.
비록 메이에르홀드가 생체역학에 관한 그의 이론을 자신의 연극 훈련 상의 다른 측면들보다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오늘날 가장 기억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생체역학이다. 많은 이론가들처럼 그의 이념은 해석되고, 재해석되거나, 잘못 해석되어 많은 오해를 받았다. 메이에르홀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연극, 다시 말해 ‘인민의 인민을 위한 연극’을 안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마도 메이에르홀드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전위예술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부조리 계열의 연극에서 눈에 띄는 생체역학과 구성주의적 접근 방법인 것이다.
4. 생체역학의 철학과 목적
생체역학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었다. 생체역학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연극, 어떤 역할의 요구사항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그것을 통하여 배우가 자신의 여러 반응을 훈련시킬 수 있는 분명하고 과학적이며 방법론적인 시스템으로 고안되었다. 생체역학의 목표는 배우의 반사행동을 훈련시켜 궁극적으로 배우에게 현실적 모습, 또는 제 2의 천성을 제공해 주는 최대의 효율성에 이 행동들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오직 극소수의 특출하게 뛰어난 배우만이 올바른 연기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역할을 내적으로부터 출발하여 외적으로 구축하는 방법이 아닌 그 반대의 방법이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의 역할을 외적으로부터 접근함으로써 최상의 기술적 성과를 이룩하였다.50)
메이에르홀드는 ‘형상화’라는 배우의 과제는 외면에서 내면으로 나타난다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는 “심리적인 기반 위에서 만든 연극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반면에 신체적인 요소에 의존하는 연극은 최소한의 명료함을 확신한다”51)며 역할을 신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을 연기의 핵심으로 간주하였다. 메이에르홀드가 그의 워크샾에서 가르쳤던 것처럼, 배우는 전도된 현실 과정, 다시 말해, 가령 공포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배우가 먼저 달리고 난 후에 공포를 연기해야 하는 과정에 몰두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전도된 상황이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행동에서 실제적 개입은 반응을 일으킬 것이며, 이것은 신체적, 혹은 동작 수단을 통하여 달성될 수 있다.
메이에르홀드는 그의 생체역학 훈련은 1)의도, 즉 어떤 행동에 대한 준비, 2) 실현, 즉 행동 그 자체로 행동을 하는 순간의 마음과 신체의 상태, 3) 반응, 즉 수행된 그 행동에 대한 새로운 준비로 시작되는 사이클(주기)을 추구한다고 설명하였다. 생체역학은 그것을 통하여 메이에르홀드가 창조과정을 다시 연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연기예술에 대한 메이에르홀드의 견해는 그가 <미래의 배우와 생체역학>에서 밝힌 것처럼 “배우의 재능은 그의 재료를 조직하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신체적 표현수단을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52) 따라서 배우는 동시에 조직자이며 피조직자이다. 즉, 예술가이며 그 재료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배우의 공식을 이렇게 정의한다.
N = A1 + A2, 여기서 N은 배우, A1은 실현 의도를 인식하고 그 자체의 실행에 필요한 지시를 내리는 설계자이며, A2는 설계자의 실현 과제를 수행하는 실행자, 배우의 신체다.53)
이고르 일린스키(Игорь Ильинский)도 메이에르홀드가 “배우는 모름지기 창시자, 지도자, 재료의 조직자이며, 동시에 그것으로 조직되어야 한다”54)고 쓰고 있다. 이것은 꼬끄랭(C. Coquelin)이 『배우의 예술』에서 주장한 바로 이중성이며55) 스타니스랍스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56) 따라서 메이에르홀드의 공식을 스타니스랍스키에게 적용했을 때는 ‘배우 = 자기자신으로서의 연기자 + 등장인물로서의 연기자’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초기의 스타니스랍스키와 메이에르홀드 사이에는 많은 거리가 있었다. 메이에르홀드는 1922년에 그들의 차이를 들며 스타니스랍스키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푸쉬킨을 생각해보자 : ‘영감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하학에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아경은 필요하지 않다.’ 무아경은 악명 높은 인간의 내적 경험이며 ‘실제적인 느낌을 주는 정서’ : 그것은 나의 스승인 콘스탄틴 스타니스랍스키의 시스템이며, 그는 아마도 도중에 그것을 포기 할 것이다. 우리는 무아경이 아니라, 신체적 구조 위에 확고하게 기초를 둔 흥분상태를 원하는 것이다.57)
여기서 메이에르홀드는 정서의 직접 사용을 주창했던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일반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주시하듯이 스타니스랍스키는 1930년대에 무대 작업에 관한 방법에 원칙적인 변경과 더불어 많은 점에서 그 교육적 관점을 재검토하였다. 그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적 본성의 유기적 통일이라는 법칙에 근거해, 창조에 대해서 심리나 체험으로부터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행동의 논리에 대응해서 반사적으로 감정의 논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체적 행동의 논리부터 접근해 가는 것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58) 이러한 스타니스랍스키의 결론은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기본 원리와 일치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타니스랍스키의 후기 작업인 신체적 행동법의 이해 부족과 메이에르홀드의 단편적인 글로 인하여 이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스타니스랍스키와 메이에르홀드는 자유롭고 즐거움을 창조하는 예술가로서 그것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신체훈련에 요구되는 호흡, 집중, 근육의 이완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극에 있어서 배우는 최상의 예술가로 믿었으며, 그 이유는 그들은 연습을 통해 배우들의 표현 매체인 그의 신체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일린스키는 메이에르홀드에 관해서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메이에르홀드가 재능이 있거나 자존심이 강한 배우를 원하지 않으며, 어떠한 배우나--- 그의 과제를 정확하게 수용하는 인형이나 로봇--- 그를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배우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더욱 분명한 것은 메이에르홀드는 배우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며, ‘연출자의 연극’에서 배우는 더욱더 중요하게 되었다.59)
스타니스랍스키와 메이에르홀드는 그들 시스템의 초기에서부터 외적 행동은 반드시 내부의 의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확실한 개념은 1800년대 중반기에 델사르트가 시작했는데, 그는 작크-달크로즈와 아피아, 그리고 발레의 개혁 및 현대무용의 전반적인 혁신에 영향을 미쳤다. 1922년 메이에르홀드는 “모든 동작은 자신의 뜻을 갖고 있는 하나의 상형문자다. 연극은 이러한 동작들을 즉시 해석할 수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다”60)라고 연설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또한 그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느끼고 경험하기를 원했다. 스트라스버그가 1934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메이에르홀드의 무대 공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에게 “무대에서 배우들이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느냐”고 묻자 메이에르홀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왜 그들이 그렇지 않느냐”고 묻자 메이에르홀드는 “갑작스럽게 말하기를 ‘그들은 나쁜 배우들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것이다.61)
저명한 무용 평론가인 존 마틴(John Martin)은 메이에르홀드극장이 맨 처음 미국 순회공연을 하려고 했을 때 <디어터 길드 매거진> 1930년 11월 호에서 메이에르홀드의 배우훈련 ‘기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생체역학 배우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먼저 복싱하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메이에르홀드는 연기의 문제를 확고한 자세, 빈틈없는 경계, 펀치의 교환, 매듭이 분명하고 타이밍이 정확한 쉴 새 없는 신체의 주고받음이 요구되는 복싱과 매우 유사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형의 훈련 흔적들은 배우들의 몸가짐에서, 특히 그러한 생체역학 훈련에 충당되는 여러 강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62)
마틴은 계속해서 배우들이 리허설하고 훈련을 할 때, 그들의 분명한 이완(긴장완화)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그 이유가 배우들이 자신들의 등장인물 연구라는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설명하였다63) 메이에르홀드 극장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동작에 대한 적절한 템포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여러 가지 훈련이 음악과 더불어 실시되는 것이 주목을 받았다. 여러 훈련 중 가장 힘든 점은 체력, 민첩성 및 유연성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판토마임 및 무용훈련은 배우들이 적절한 말씨, 미적 감각, 우아함, 유동(흐름)으로 표현력 있게 움직이고, 모든 신체 부위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촉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시스템에서 훈련받은 배우는 자기 주변의 생활을 느끼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보고 만지는 법을 배운다. 그런 배우는 장래의 필요성에 대비하여 저장할 수 있는 여러 경험을 찾아 자신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이리저리 배회하지 않는다. 그런 배우는 자신의 신체를 빈틈없고 기민하게 유지하며, 신경성 반응을 예리하게 유지하는 데 그의 모든 노력을 쏟는다.64)
스타니스랍스키처럼 메이에르홀드도 신체훈련의 최종 목표를 자연스런 신체의 효과적인 이용에 두었다. 이것은 최상의 가능한 신체 조건에서의 중립적인 신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중립적인 신체, 자유로운 신체에 대한 그의 관심은 생체역학이 어떠한 양식이나 방법으로 강요되지 않기를 원했다. 일린스키에 의하면 메이에르홀드는 운동, 발레 스텝, 또는 곡예 등의 과도한 사용은 신체를 틀에 박힌 양식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배우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65) 메이에르홀드의 다음의 말은 우리의 신체훈련 및 무대동작의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이 된다.
체육, 곡예, 무용, 율동, 권투, 펜싱 등은 모두 유용한 활동이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배우훈련의 중요한 기초라고 할만한 ‘생체역학’의 과정 속에서 배우의 훈련을 보조할 수 있는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한다.66)
에드워드 브라운이 적절히 지적한 바, “생체역학이 메이에르홀드에게는 모든 배우훈련의 근본 토대”67)였다. 메이에르홀드의 배우훈련 기법은 스타니스랍스키에 의하여 주창된 깊은 내성적 훈련에 대한 대안(代案)을 제공한다. 연기의 초점은 외면적 표현이지 내면적 충동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선봉했다는 점에서 메이에르홀드는 델사르트에 가까웠다. 그러나 스타니스랍스키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대 위에서의 상호작용 또는 여러 관계의 중요성을 느꼈다. 두 사람은 또한 연기에서의 ‘최고 경험’을 획득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 크게 달랐으나, 그 경험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는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은 스타니스랍스키의 신체적 행동법과 상호보완 작업을 거쳤을 때, 신체훈련 및 무대동작은 물론 연기훈련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5. 맺음말
지금까지 필자는 연기훈련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연기론을 검토하는 가운데 그의 생애와 그의 생체역학의 개발과 발전, 그리고 그 철학과 목적을 살펴보았다
메이에르홀드의 생애는 예술과 헌신의 본보기다. 그는 전위예술을 표방하였으나 다른 수많은 예술가처럼 잘못 인용되고, 잘못 읽혀졌으며, 잘못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근본적 원인은 스타니스랍스키와는 달리 그의 연극이념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위배되어 자신의 시스템이나 극장이 존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타니스랍스키처럼 그도 자신의 저서를 개정하고, 당시나 미래의 독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이론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정치적 상황이 후세 연극인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아마도 그를 추종하는 연극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메이에르홀드의 공헌은 생체역학적 연기론으로 불리는 분야일 것이다.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은 러시아에서 혁명전 그 자신의 훈련기간 동안 시작되었다. 그는 비록 스타니스랍스키를 존경했지만, 스타니스랍스키의 연극개념이나 스타니스랍스키가 주도했던 자연주의 연극 운동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당시의 여러 제약에 저항하고 연극을 정형화하고 양식화하여 자기 스타일의 연극을 실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체역학을 개발하였다. 생체역학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연극, 어떤 역할의 요구사항도 충족될 수 있도록 그것을 통하여 배우가 자신의 여러 반응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과학적이며 방법론적인 시스템으로 고안되었다. 생체역학의 목표는 배우의 반사행동을 훈련시켜 궁극적으로 배우에게 현실적 모습, 또는 제 2의 천성을 제공해 주는 최대의 효율성에 그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메이에르홀드의 영향은 오늘날의 전위예술 및 현대 연기자들의 훈련 테크닉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현대적인 무대장치, 연기, 관객 참여의 범위를 변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동작의 표현 능력을 믿었고 그러한 장치 속에서 자신의 연기자들을 가르쳤다.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은 스타니스랍스키의 시스템과 정반대라는 인식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스타니스랍스키의 후기 작업인 신체적 행동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에서 파생된 선입감이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사실을 필자는 검토하였다. 비록 그들이 추구하는 연극관 및 연출관은 달랐어도 연극의 중심에 배우를 두었고, 연극의 핵심 인자인 배우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들은 일치하였다.
메이에르홀드의 저서와 그의 생체역학적 연기론은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 현대연극에서의 그의 위치와 그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한국은 연기훈련에 대한 인식부족과 방법론의 부재로 배우훈련에 대한 새로운 혁신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메이에르홀드의 생체역학적 연기론은 그 전면적 해결책은 될 수 없을지라도 좋은 참고가 되리라 기대한다.
메이에르홀드는 그의 의문에 둘러싸인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생체역학을 연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1930년에 존 마틴이 얘기했던 다음의 글은 의미심장하다.
생체역학은 메이에르홀드의 창조적인 두뇌에서는 분명, 보다 유용한 연장을 이미 고안했는데도, 단지 그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연장에 불과하다. 메이에르홀드에게 있어서 연극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든 이론은 지향하는 바를 지향하도록 내버려 두라.68)
현대의 연기훈련은 다양하다. 다양한 만큼 다양한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연극의 다양성과 확장을 위해서. 이러한 측면에서 메이에르홀드의 연장은 우리들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주(註)
1) В. Э. Мейерхољьд. 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т.1, М., Искусство, 1968,
pp.129-131.
2) М. Туровская. Бабанса Легенда и биография. М., Искусство, 1981. p.87.
3) James Symons, Meyerhold's Theatre of the Grotesque. Coral Gables.
Florida : University of MiamiPress, 1971, p.15.
4) 이에 대해선 졸저 <스타니스랍스키,어떻게 볼 것인가?>, 예니출판사, 1996,
107-128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5) Edward Braun. trans. and ed. Meyerhold on Theatre. By Vsevolod Emilevich Meyerhold. New York : Hill and Wang, 1969.
Edward Braun, The Theatre of Meyerhold : Revolution on the Modern Stage, New York : Drama Book Specialist, 1979.
6) Paul Schmit (ed.), Meyerhold at Work. trans. Paul Schmit, Ilya Levin, and
Vern McGee, Austin :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0.
7) M. Hoover. Meyerhold : The Art of Conscious Theatre. Amherst, Mass. :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74.
8) James Symons, 앞의 책.
9) Konstantin Rudnitsky, Meyerhold the Director. trans. George Petrov, ed.
Sydney Schultze, Ann Ardis, 1981.
10) Robert Leach, Vsevolod Meyerhold.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11) Встречи с Мейерхольдом, сборник воспоминаний. М., ВТО, 1967.
pp.226-227.
12) 메이에르홀드에 관한 1974-90년까지의 참고문헌은 다음의 책 제2권 pp.227-
277을 참고하기 바란다.
Мейерхольдовский сборник. Выпуск первый. М., Творческий центр имени Вс . Мейерхольда, 1992.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저서에는 다음의 책이 있다
А. К. Глдков. Мейерхольд М., Союз театр. деятелей РСФСР, 1990.
Мейерхольд репетирует 1-2. Сост. и авт. комент М. М. Ситковецкая
М., Артист Режисcёр. Театр, 1993.
13) Встречи с Мейерхольдом, p.15.
14) 辛石然, 「大戰以後 各國劇壇發展過程 -露國」,『동아일보』, 1929. 1. 25-2. 1.
15) 咸大勳, 「世界劇壇의 動態-露西亞劇壇의 展望」, 『조선일보』, 1931. 10. 25-11. 17
16) 咸大勳, 「新劇運動의 震源地打診(其一)-모스크바 藝術座의 걸어온 길」, 『劇藝術』 創刊號(1934. 4. 18), pp.22-25.
17) 咸大勳, 「世界劇界巡訪(其一-露國)-最近의 사베트 演劇」,『동아일보』, 1933. 12. 16-20.
18) 홍해성이 「名演出家巡禮」의 일환으로 스타니스랍스키, 막스 라인하르트, 고든 크레이그에 이어 네 번째로 소개하는 메이에르홀드에 관한 글(『조선일보』1935년 4월 26일-28일자)은 그의 독자적 연구가 아니고, 독일인 René Fülöp-Miller, Das Russische Theater의 일어 번역본 『ソヴェト演劇史』(園池公功, 三林亮太郞 譯編, 建設社, 1932.)와 『現代の ソヴェト演劇』(ノヴィツキイ, マルゴーリン, 野崎韶夫 譯, ナウカ社 , 1934.)을 발췌 번역한 글이다. 참고로 스타니스랍스키에 대한 글도 『ソヴェト演劇史』pp.105-114를 표절하고 있음을 졸저(16쪽과 201쪽 참조)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19) 고승길(편역), 『현대연극의 이론』, 서울, 삼일각, 1975.
20) Н. Волков, Мейерхольд 1(1874-1908). М-Л., Academia, 1929, p.7.
21) 메이에르홀드는 소년시절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에 출연한 바 있다.
22) В. И. Немирович-Данченк. Из Прошлого. М., Academia, 1936, p.126.
23) К. Рудницки. Мейеерхольд. М., Искусство, 1981, pp.29-30.
24) Symons, 앞의 책, p.24.
25) К. Рудницки, 앞의 책, pp.48-55.
26) А. К. Глдков. Мейерхольд 2. М., СТД. РСФСР, 1990, p291.
27) К. С. СтаниславскийСобр. соч., т.1. М., Искусство, 1954, p.280.
28) В. Э. Мейерхољьд. <Театр (К истории и технике)>. В сборнике статейТеатр Книга о Новом театр, Спб,. изд. <Шиповник>, 1908.
29) Toby Cole and Helen Krich Chinoy, Actors on Acting. New York : Crown Publishers, 1970, p.501.
30) Mel Gordon, "Meyerhold's Biomechanics" Drama Review, Spring, 1974, P.73.
31) В. Э. Мейерхољьд. 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т.1, М., Искусство, 1968,
p.88.
32) Oscar Brockett, History of the Theatre 4th. ed., Boston : Allyn and Bacon, 1982, 1982, p.614.
33) C. Moody, "Meyerhold and the Commedia dell'Arte', Modern Language Review, October, p.859.
34) Любовь к трем апельсинам, 1914, No 4-5, p.54.
35) Встречи с Мейерхольдом, p.125.
36) 앞의 책, pp.322-323.
37) Lee Strasbeg, Russian Notebook(1934)", The Drama Review, V.17(March, 1973), p.106.
Mel Gordon, 앞의 논문, p.80.
38) André Van Gyseghem, Theatre in Soviet Russia, London : Farber and Farber, Ltd., 1943, pp.29-30.
39) Mel Gordon, 앞의 논문, pp.29-30.
40) 위의 논문, pp.73-74.
41) 위의 논문, p.75.
42) 위의 논문, p.76.
43) Joseph R. Rdach, The Player's Passion : Studies in the Science of Acting, New York : University of Delaware, 1985, p.198.
44) 위의 책, pp.198-199.
45) Mel Gordon, 앞의 논문, p.77.
46) К. Рудницки. Режисcёр Мейерхољьд. М., Издательство <Наука>, 1969, P.261.
47) M. Hoover. Meyerhold : The Art of Conscious Theatre. Amherst, Mass. :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74, p.100.
48) 위의 책.
49) В. Э. Мейерхољьд 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т.2, p.489.
50) 앞의 책.
51) 앞의 책.
52) 앞의 책, p.487.
53) 앞의 책, pp.487-488.
54) Игорь Ильинский. Сам о себе. М., ВТО, 1961, p.158.
55) Коклен-Старший, Искусство актёр Перев. с Франц. Г. Мовшенсона. Л.-М., Искусство, 1937. p.26.
56) 서방의 많은 사람들은 스타니스랍스키의 ‘무대의 창조적 상태’나 관객의 존재를 인식하는 논리를 오해하고 있다. 그는 등장인물과 연기자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배우란 무대에서 살고 웃고, 더욱이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문물이나 웃음을 감시하고 있다. 이 이중의 기능, 이 생활과 연기의 평형, 즉 그의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고 역설한 살비니(Tommaso Salvini, 1829-1916)의 말을 이용해 배우의 이중성을 역설하고 있다.
К. С. СтаниславскийСобр. соч., т.2. М., Искусство, 1954, p.328.
57) Театральная Москва. М., 1922, No.45, p.10.
58) Г. Кристи. Воспитание Актёра Школы Станиславского. М., Искусство, 1968, p.31.
59) Игорь Ильинский. 앞의 책.
60) Театральная Москва. 앞의 책.
61) Lee Strasbeg, "Russian Notebook", p.108.
62) John Martin. "How Meyerhold Trains His Actors", The Guild Magazine, November, 1973. P.26.
63) Ibid.
64) Ibid., p.28.
65) Игорь Ильинский. 앞의 책, p.156.
66) В. Э. Мейерхољьд. Статьи, письма, речи, беседы, т.2, p.489.
67) Edward Braun. trans. and ed. Meyerhold on Theatre, p.200.
68) John Martin, 앞의 글, p.30.
참고문헌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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