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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논문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한국수용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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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연극 2013년 8월호>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 한국수용 소고

                 -스타니스랍스키연기원을 중심으로-

 

                 나상만 (스타니스랍스키연극재단 이사장)

 

1. 들어가며

 

   스타니스랍스키가 미국연극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레이몬드 톰슨(R. L. Thompson)은 스타니스랍스키를 분기점으로 연극의 역사를 구분한다. <세계연극 (World Theatre)>의 편집자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거장의 영향력은 “예전부터 모든 선두주자들에게 침투되었다.”

 

   그러나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수정된 개념인 ‘신체적 행동법’이 정확하게 수용되고, 그것이 교육과정에 완벽하게 반영된 나라는 많지 않다. 러시아 교육계가 인정하듯이 한국은 시스템이 가장 단기간에 정확하게 수용된 유일한 나라다. 그 중심에는 모스크바 슈우킨 연극대학과 한국의 스타니스랍스키연기원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올해는 스타니스랍스키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또한 불세출의 연출가 박흐탄코프가 창설한 슈우킨 연극대학이 창설 99년을 맞았다. 아울러 시스템의 한국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슈우킨 연극대학에 한국스튜디오가 창설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연극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극단이 있다. 동아연극상과 PDF 연출상/연기상을 수상한 극단 <동>과 서울연극제 ‘미래야솟아라’ 부문에서 작품상/ 연출상을 수상한 극단 <창세>가 그 대표적이다. 두 극단은 연출자와 배우들의 대부분이 슈우킨 연극대나 스타니스랍스키연기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98년 숭실대에서 창설되어 경기대로 이어지는 연기원의 교육적 성과와 위상은 거창연극제에서 작품상과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이래, 또다시 연기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진가가 공식적으로 증명되었다.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한국 수용사를 논할 때, 최소한 슈우킨 연극대와 쉐프킨 연극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원고 매수의 제한으로 이에 대한 논의는 별도의 연구로 돌리고, 본고에서는 슈우킨 연극대 한국스튜디오(이하 한국스튜디오)와 이에 연계되어 한국에 창설된 스타니스랍스키연기원(이하 연기원)으로 시각을 좁힌다.

 

2. 슈우킨 연극대학 한국스튜디오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한국 수용은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간접적 수용을 거친 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그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를 만든다. 스타니스랍스키는 시스템을 죽는 순간까지 수정하고 그의 저서들을 다듬었다. 그의 시스템의 정수인 ‘신체적 행동법’은 50년대에 이르러 정리되어 성장과 발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일본과 미국을 통해서 도입된 시스템은 그 변형된 개념이고,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스타니스랍스키의 계승자 박흐탄코프가 창설한 슈우킨 연극대와 한국연극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대학에 한국스튜디오를 창설하여 미래의 연기교육자를 양성하는 인큐베이터의 역할을 하여 전 세계의 스타니스랍스키 수용사에서 전례가 없는 성공적 롤모델을 성취, 한국의 연기교육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슈우킨 연극대 블라드미르 에투슈 총장과의 만남은 92년 6월 29일 연극지 <티아트랄라야 쥐즌>의 편집장 알레그 삐바로비치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필자가 슈우킨을 선택한 이유는 박흐탄코프의 명성이 아닌 커리큘럼과 교수진에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의 연기교육을 혁신시키고자 하는 필자의 청사진을 에투슈 총장이 가장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스튜디오의 설립에 합의하고 수차례의 만남을 거쳐 커리큘럼과 교수진을 구성하고 운영 방법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93년 1월 에투슈 총장과 유리 압샤로프 교수가 필자와 함께 방한하여 한국 유학생 10명을 선발하였다. 그해 2월부터 6개월간의 어학과정을 거쳐 현지 유학생 2명을 규합, 총 12명으로 출발한 스튜디오는 가을학기 대망의 첫 수업을 하게 된다. 슈우킨 대학은 소수정예의 이 특별과정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강도 높은 훈련과 막중한 수업량, 엄격한 평가제도로 중도에 탈락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소문을 듣고 편입해 온 타 대학의 학생들이 합류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필자는 ‘전문가입문’이라는 과목을 담당하면서 수업에 참여하여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며 모든 발표회와 평가에 참여했다. 그 결과 95년 7월 석사 2명을 필두로 96년 석사 1명, 97년 학사 7명, 석사 7명을 배출하게 된다. 그중의 일부는 다음 단계의 과정을 밟으며 연기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한 슈우킨 연극대학은 한국의 연기원 출신들을 연차적으로 편입시키면서 오늘의 연기교육자=배우를 양성시키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기반이 오늘의 연기원을 설립하고 이끌어가는 탄탄한 자양분이 되었음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3. 스타니스랍스키연기원

 

   필자는 96년 1월 귀국하여 연극원을 비롯한 여러 대학과 단체에서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정착을 위해 나름의 땀을 흘렸다. 그러나 정규대학에서 제대로 된 연기교육을 펼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단독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결단으로 슈우킨 연극대학과 커리큘럼의 공유와 학점인정, 학생 및 교수진의 교류, 연기원 졸업생의 슈우킨 편입에 관한 협약을 맺고 98년 2월 연기원을 창설하게 된다. 슈우킨에서 학위를 끝낸 재원들이 차례로 귀국하여 교수진을 구성할 만한 여건이 형성된 것이다.

 

   연기원은 그해 3월 1) 독립학교로의 발전 2) 커리큘럼의 구성과 교수진 구성의 자율성 3) 3년의 수업연한 4)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숭실대 부설학교로 출발하였다. 연기원이 학위과정이 아니었지만 학생모집에 성공한 이유는 체계적이고 다양한 커리큘럼과 많은 시간의 실기수업, 슈우킨 출신과 현장 연극인으로 구성된 교수진, 슈우킨으로의 편입, 그리고 대대적인 광고와 홍보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1기 35명, 2기는 124명을 모집했다. 상당수는 대학 진학을 단념하고 지원했고, 대학을 중퇴하고 지원하는 자도 많았다. 특히 지도자과정은 슈우킨 학사 출신과 국내 연극전공 졸업생, 그리고 현장 연극인들은 물론 대학원에서 연극을 전공하거나 학위를 이미 취득한 지원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주당 9시간의 연기수업은 필자를 주임교수로 정호붕, 박상하, 최용진, 강량원, 김유석, 김유신이 분반하여 담당했고, 무대동작은 한중곤과 남긍호가 맡았으며, 고승길, 허동성, 장성식, 안창경, 백은아, 양종승, 무세중, 김성희, 이남이, 박미애. 김수정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론, 무용, 탈춤, 화술, 창, 성악 등 주당 34시간의 수업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2차에 걸쳐 슈우킨 교수 4명을 초빙하여 계절학기를 개설하였다. 또한 유학을 대비하여 러시아어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했으며 지도자과정을 개설하여 슈우킨 졸업생들과 연극인들을 재교육시키며 미래를 준비하게 된다.

 

   연기원은 01년 2월 동숭아트센터에서 1회 졸업공연 <칠산리>를 끝으로 ‘숭실시대’를 마감한다. 학부에 연기전공을 신설한 경기대가 99년 겨울, 연기전공 교수를 공모하게 된다. 연기원은 당초 독립학교로 발전시킨다는 숭실대와의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독립법인을 설립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으로 이사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필자가 새로운 재단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방안의 하나로 경기대를 선택한 것이다.

 

   대학과의 전쟁(?)을 통해 확보한 숭실대 연기원의 교육 환경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경기대는 단 하나의 실습공간에서 40명이 넘은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주당 3시간밖에 없는 연기수업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강좌명은 그대로 두고 이론수업을 연기실습으로 돌리는 촌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직서 들고 다니면서 커리큘럼을 개편하고 대학을 설득하여 소극장 건립과 300평의 실습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국 연기원은 숭실대 동의를 얻어 학생 전원과 교수진 모두를 경기대가 수용, 2001년부터 ‘충정로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01년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친 1기 졸업생 12명중 10명이 대망의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다. 슈우킨 3학년에 편입되어 한국스튜디오 2기 과정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로의 편입이 현실로 이루어지자 연기원은 경쟁력을 갖게 된다. 교수진을 대폭 확대하고 그들과 팀티칭을 이루어 학위를 취득한 2진들과 지도자과정 출신들에게도 강의를 맡겼다. 현장인들에게도 ‘연기’ 이외의 수업은 전면 개방했다. 조명남, 한덕치, 박원경, 김영무, 이승호, 강만홍, 정혜승, 김영자, 김철리, 송미숙, 위성신, 하병훈, 이정직 선생이 강의에 참여하였다. 심철민, 이재준이 철학과 미학을 담당했으며 유미경, 올가 드라축, 최지영이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수업은 발표회를 통해 공개되고, 여기서 학생들의 평가와 함께 교수진들의 평가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필자가 참여한 교수회의를 통해 일관된 교수법이 정리되면서 연기원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더구나 대학원에 연기학과가 창설되자 현장인과 국내외의 연극학도들이 지도자과정과 대학원에 지원하면서 경기대는 연기교육의 새로운 메카로 부상되었다. 또한 2명의 러시아 교수들을 초빙하여 세 번째 계절학기를 개설하게 된다.

 

   01년 12월부터 대학로 <열린극장 Play+>에서는 연기원 2기들의 졸업공연이 펼쳐졌다. 경기대 연기학과 졸업공연 <산불>에 이어 공연된 <오르페우스의 후예>, <베르나느다 알바의 집>은 시스템에 의해 훈련된 학생들의 연기가 확연하게 다름을 보여 주었다. 3일간의 충분한 리허설을 공연장에서 갖는 일은 당시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이 공연들은 학생극으로는 전례가 없는 7회씩의 공연을 시도하였다. 공연도 수업의 연장선이라는 교육과제가 반영된 것이다. 연기자는 연습기간에 얻지 못하는 많은 것을 공연 중에 체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공연에 앞서 연기원의 전 교육과정이 외부에 공개되었다.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교육과정이 전체적으로 소개되는 일은 그때가 최초였다.

 

   02년 2월 졸업생 15명이 다시 유학길에 오른다. 그들이 스튜디오 3기생으로 슈우킨에 편입하여 선배들의 전철을 밟아 학업을 이어갔다. 그 후 연기원은 03년과 04년 두 차례에 걸쳐 졸업생들을 슈우킨에 보낸다. 5기를 끝으로 한국스튜디오는 더 이상 개설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한국의 연기교육은 자생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01학년도부터 학점은행제를 시행하여 학사학위를 취득하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4. 나가며

 

   “한국스튜디오는 멋 훗날 한국연극의 발전에 막강한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세계연극의 표본이 되었던 것은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에 의해 훈련된 배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학위논문 마지막에서 선언했던 예견들이 18년이 지난 지금, 현실화되고 있다. 아직은 ‘막강한 힘’이 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은 기대해 볼 만하다.

 

   스타니스랍스키-박흐탄코프로 연결되는 시스템의 계보는 슈우킨 한국스튜디오-스타니스랍스키연기원의 수용 과정을 거쳐 한국의 연기교육과 무대에 반영되었다. 두 기관을 거쳐 박사 3명, 석사 37명(연기26명, 연출 3명, 무대동작 6명, 화술 2명) 학사 100여명을 양성하였다. 현재 20여명이 교수로 재직 중이며 30여명이 대학에서 연기수업을 담당하고 있다.

 

   연기원의 교육은 이제 2세대에 의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창설 16년 만에 5명의 전임교수를 배출했고, 많은 동문들이 ‘연기’와 ‘무대동작’, ‘화술’을 가르치고 있다. 100여명 이상의 훈련된 배우들이 동문극단을 비롯하여 여러 극단에서 활약 중이다. 국립극단 <햄릿>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김아라와 PDF 연기상을 수상한 김민석, 그리고 서울연극제 작품상과 연출상을 수상한 백석현은 그 교육의 외적 결과물일 뿐이다.

 

   필자의 손을 떠난 연기원은 이제 스스로의 자생력을 갖고 다른 대학과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할 운명에 직면에 있다. 많은 대학이 그들의 스승과 선배들에 의해 시스템을 수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특혜를 독점했던 우물 속을 헤쳐 나와 아직도 다가오지 않은 그 ‘먼 훗날’을 향해 정진해야 할 것이며, 대학은 그 교육환경 개선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결국은 스승의 책임이다.

 

   자신이 배운 거나 가르치는 것을 시스템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시스템은 유기체다. 시스템은 성장하고 있는데, 자신은 정체되어 있다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교육자=예술가가 매너리즘에 빠지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안일과 타성은 예술과 교육의 적이다.

 

   교수는 많아도 스승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다. 학생은 많아도 제자가 없다. 그러나 제자가 없다는 것도 결국은 스승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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