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전국은 열대야로 들끓고 있다. 그러나 목포는 입추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다.
우리 일행이 레이니어 국립공원 파라다이스에 머무른 시간은 고작 한 시간 30분이었다. 60마일 거리에 있는 시애틀로 돌아가 캠핑카를 반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애틀 - 타코마 국제공항을 거쳐서 샌디에이고로 돌아가는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레이니어 국립공원 파라다이스를 산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서 올라야 하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내가 산 정상을 돌아다니면서 본 고산 정원 중에서 가장 호사스럽고, 가장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곳..."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 존 뮤어(John Muir)의 글이다. 뮤어는 1888년 8월 8명의 일행과 함께 파라다이스를 거쳐 레이니어산의 정상에 오른다.
레이니어산 파라다이스의 탐험은 이 계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이 계단 이상을 오르지 않았다.
레이니어산의 정상에 오른 뮤어와 등반대. 앞서 이야기했지만 뮤어는 등반대원과 함께 1888년 8월 레이니어산의 정상에 올랐다. 바로 136년 전의 이때쯤이다.
파라다이스에서 이 계단 이상을 오르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레이니어산을 다시 방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휴대폰의 용량이 가득 찼다. 더 이상 그대로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혹시나 하고 방문객 센터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휴대폰이 터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밀린 카톡들의 사연이 수없이 쏟아진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영상이나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밉다.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이나 글은 애교로 넘길 수 있다. 그래서 남이 만든 긴 동영상이나 반복되는 정치성 카톡은 가차 없이 삭제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시간에 그렇게 파라다이스 방문객 센터에서 카톡을 지우고 있었다. 지우고 지워도 계속해서 올라오는 카톡. 그 카톡을 아마도 2만 건 이상은 삭제했을 것이다.
방문객 센터에서 수행해야 했던 일이 또 하나가 있다. 사진의 저장공간을 확보해야 할 상황이었다. 단 몇 컷의 사진이라도 촬영하기 위해서는 옛날 사진이나 비슷한 사진을 휴지통에 버리고 삭제해야 할 운명이다.
파라다이스에서 남긴 사진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촬영이 중단되면 다시 센터를 방문하여 옛날 사진을 지운다. 그 사이에 또 경쟁하듯 카톡이 들어온다. 정말이지 카톡은 내 일을 방해하는 파라다이스의 악마였다. 그 순간은 정말...
방문객 센터가 있어서 아래의 사진들을 담을 수 있었다.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시애틀로 행했다. 서두른 덕분으로 캠핑카를 반납하고도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시애틀 시내 모습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짧은 시간에 졸속으로 촬영한 사진을 블로그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공항 복도에서 담은 사진으로 시애틀이란 도시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레이니어산이여!
시애틀이여!
다시 만나자 마운트 레이니어!
굿바이 시애틀!
마운트 레이니어를 미국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 뮤어의 글을 검색하느라 뜬눈으로 토요일 아침을 맞이하였다. '연극'에 스타니스랍스키가 있다면 미국의 '고산과 국립공원'에는 존 뮤어가 존재하고 있다. 뮤어의 말을 끝으로 3박 4일의 워싱턴주 탐방을 여기서 일단 끝내기로 하겠다.
"서부를 만든 과정에서 자연이 휴식, 영감, 기도를 위한 장소인 공원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 레이니어 지역도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다."
자연을 사랑한 존 뮤어.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나의 여름은 내 생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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