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나상만
48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께!
들어가는 글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고사가 그리운 시절이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반대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동시(同時)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과 역할에 대한 최고의 사자성어가 아닐까.
‘미투’ 운동으로 대학가가 시끄럽다. 우리 사회의 지성으로 추앙받던 대학교수가 대한민국에서 명함을 내밀기 힘들다. 날마다 쏟아지는 교수들의 성추문과 성범죄가 심각한 수준이다. 꼭 이건만은 아니지만“교수는 많아도 스승은 많지 않다.”는 말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학생은 많아도 제자가 없다”는 말도 들린다. ‘존경’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가 ‘미투’열풍에 침몰되는 느낌이 들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요즘 언론들이 미투 운동을 지나치게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만 집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면(裏面)에 도사린 적폐는 보지 않고 드러나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속은 곪아터졌는데 반창고만 붙이는 격이다. 이러다가 대한민국 남자는 ‘아버지’ 빼고는 죄다 얼굴에 반창고나 붕대를 감아야 할 지경이다.
‘줄탁동시’의 고사를 잘못 이해하여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일에 일조(?)하고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폐기처분시킨 위대한(?) ‘스승’과 ‘제자’가 있다. 박근혜정부의‘문화계 황태자’였던 제자는 국정농단의 중심인물인 최순실(崔順實)에게 스승을 천거(薦擧)했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은 스승과 제자의 ‘존경’과 ‘사랑’의 미담(美談)에 감격하여 ‘스승’을 대한민국 48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한다. 스승이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날은 2014년 8월 21일이다.
장관이 되기 전에 스승은 대학교수였다.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 지향형의 교수인‘폴리페서’(politics+professor)와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만 매몰된 채 학문 연구나 학생 교육을 소홀히 해 대학이나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철새’ 교수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과 대학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대한민국의 문화를 피폐(疲弊)하게 만들고 급기야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김종덕(金鍾德) 전 장관과의 인연을 개인적으로 치부(置簿)하거나 사소한 일로 폄하(貶下)하지 말기를 기대한다. 분풀이의 일환이나 공명심(功名心)의 발로(發露)라고 해석하는 것도 경계한다. 대학과 기업은 물론, 공공기관, 정부와 지자체의 고위층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적폐의 숨은 일화를 소개하여 미래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편의상 서간체(書簡體)의 형식을 취한다.
제1신
김종덕 장관 귀하!
춘분(春分)인데도 바깥 날씨는 쌀쌀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 즈음의 날씨를 두고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고 했나 봅니다.
《중종실록》을 보면 어머니를 구타한 사람을 참형(斬刑)하게 되었는데 참형 시기를 춘분에 맞췄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검찰이 춘분 이틀 전인 19일 MB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답니다. 춘분을 1년의 새로운 출발로 인식하여 좋지 않은 일은 춘분 전에 끝내려 했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네요.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그때는 장관이 아니었기에 '귀하'(貴下)라고 호칭하겠습니다. 귀하를 장관으로 임명한 대통령도 그냥 이름만으로 부르는데 저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예의입니다. 귀하께서는 제 이름을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스타니스랍스키가 주창한 연기용어(演技用語)인 ‘정서적 기억(Emotional Memory)’을 통해 당신 의식 속에 잠재(潛在)된 기억을 회상시켜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2012년 초여름에 이루어졌습니다. 귀하는 그때 H대학교 영상대학원장이었고, 대학원에서는 ‘공연예술’ 전공을 신설하여 교수채용을 하게 되었죠.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운영하고 있던 소생(小生)에게 참으로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죠. 더구나 응시자격이 꽤나 까다로워, 그 모든 것을 충족하고도 남는 소생은 마치 “나를 두고 채용공고를 하지 않았나?” 하는 쾌재를 부르며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기억이 떠오르나요? 아직도 모르겠다고요?” 그럼 시각적 기억과 청각적 기억을 혼합하여 더 설명을 올리겠습니다.
최종면접에 오른 소생은 총장을 비롯한 교무위원들 앞에 앉아 면접에 임하게 되었지요. 그때 귀하는 내 쪽에서 볼 때, 맨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열 세 분의 면접위원 앞에 앉아 관찰을 당하는 소생이었지만 전 귀하의 첫 인상을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다음과 같이 지원동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나라에 ‘연기’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대학원이 없습니다. 예술인재 양성의 요람 00대학교에서 저의 마지막 꿈을 펼쳐보겠습니다. 한국, 러시아, 미국에서의 30여년의 교육과 창작 경험을 살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글로벌 인재와 연극교육자를 양성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또 하나는 00대학교가 LA에 미국캠퍼스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설립한 대학이 모체(母體)가 되어 00대학교의 글로벌화에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당시 소생은 대학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죠. 투자를 약속했던 분의 갑작스런 사고로 새로운 투자자를 구해야 할 처지였죠. 이때 구세주처럼 제 앞에 나타난 것이 귀하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이었습니다. 그러자 귀하께서 물으셨습니다.
“Stanislavsky College of Acting이 미국 어디에 있습니까?”
“Los Angeles에 있습니다.”
“인가를 받은 대학입니까?”
“네. 캘리포니아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대학입니다. 00대학교가 이 대학을 인수하면 4년의 시간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총장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기서 미국 분교 얘기는 하지 맙시다. 지원자께서는 우리 대학에 부임하셔서 대학원을 어떻게 운영하실 지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시 총장께서는 귀교의 LA 분교 설립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귀하께서 방향을 바꿔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즘 문화기술(Cultural technology)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공연과 영상의 접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아주 좋은 질문이십니다. 살아있는 배우와 영상의 만남을 이제 검토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무대장치와 조명 분야에서 R&D(연구와 개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구와 개발은 콘텐츠와 기술의 결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정부와 대학, 공연예술가와 CT 전문가와의 협업 속에서 가능합니다. 00대학교가 그 선도적 위치에서 이를 주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보낸 긍정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국 명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귀하와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소생은 그 점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지요. 그때만큼은 서로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갖고 있었어요. 소생은 그렇게 해석했답니다.
며칠 후 대학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었어요. 미국 분교 설립에 대한 조언을 받고 싶다는 요청이었지요. 소생은 대학을 방문하여 기획처장과 부총장을 만났습니다. 미국에 대학을 설립하는 절차와 방법도 모르고 대학 캠퍼스를 먼저 구입하려 했던 대학 측에 소생은 자세한 정보를 제공했고, 만일 귀교의 일원이 된다면 소생의 대학을 조건 없이 헌납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피력했습니다.
전임교수는 아니었지만 귀교의 초빙교수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 커리큘럼을 짜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제 주위의 제자나 후배 교수들은 그렇게 믿었지요. 임명권자로부터 임용장을 받기 전에는 장담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하고서 말입니다. 최종 결과가 발표되는 날 교무처에 연락을 했습니다.
“교수채용 최종 결과 발표했나요?”
“무슨 과입니까?”
“영상대학원 공연예술 전공입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 공연예술 전공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뭔가가 꼬이고 있다는 의문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공연예술 전공만 미정(未定)인가요?”
“네.”
“이유는 뭔가요?”
“저희들은 몰라요. 그렇게 통보 받았어요.”
며칠 후 교무과에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핏줄 같은 희망을 걸고 귀를 기울었지요.
“영상대학원 공연예술 전공은 이번에 선발하지 않았어요.”
“왜죠?”
“그렇게 통보 받았어요.”
그리고 며칠 후 학교로부터 정식 통보가 왔습니다. 이메일을 통해서였죠. 그래도 대학은 친절과 예의가 남아 있는 유일한 조직체라고 여겨집니다.
본교 2012년 후기 교수채용에 응모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경력과 연구실적이 특출함에도 불구하고 본교에 모시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출한 서류와 연구실적물은 응모 시에 기재한 주소로 반환해 드릴 예정입니다.
4일 후, 집으로 박스 하나가 소포로 도착했습니다.
대학에 제출했던 지원서와 경력증명서, 연구실적물이었지요. 귀하께서도 교수가 되기 전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각종 경력증명서를 발급해 본 경험이 있으시겠죠. 미국과 러시아에 경력증명서를 의뢰하고 발급하는 과정이 한국과는 다르지요. 요즘에야 인터넷에서 발급하거나 동사무소에서 민원발급이 가능하지만 부산, 광주, 전주에까지 연락하여 서류 준비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지요.
서류를 대학에 다시 돌려보내며 교무처장과 총장님 앞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요지는 세 가지의 질문과 함께 공연예술 전공의 교수를 선발하지 않는 이유를 답변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저의 당돌한 요구에 순수하신 교무처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어요. 그런 분이 대학에서 보직을 맡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지금 생각해도 착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학원 공연예술 전공에서 ‘연기’분야 교수를 제일 먼저 채용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러 곳에 자문을 했는데, 연기 분야가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혹시 내정자가 있었나요?”
“결단코 없었습니다.”
“그럼, 왜 뽑지 않았나요?”
“......”
“적격자가 없다는 말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중론이...”
“도대체 어떤 대단한 분을 뽑으시려고 적격자가 없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전임도 아닌 초빙교수를. 처장님도 적격자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전, 뭐...... ”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장님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처장님과의 통화는 그렇게 마쳤습니다. 의문을 풀기 위해 대학 사이트에 들어가 이사회의 회의록을 검토했지요. 영상대학원 공연예술 전공을 폐지하고 2013학년도부터 ‘공연예술대학원’으로 확대, 개편한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방해 공작을 했다는 의구심을 갖진 않았습니다. 한 학기의 초빙교수 월급을 절약하기 위해 대학이 교수초빙을 한 학기 미루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 기사를 접했습니다. 모 대학의 교수가 정년 1년을 남기고 귀 대학의 공연예술대학원장으로 부임한다는 기사였지요. 잘은 모르지만 서로가 조금은 알지요. 그분이 이전 대학에서 재직하던 시절, 신임교수를 채용할 때에 외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귀교의 전신(前身)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지만 공연예술 분야의 미국 석사학위도 갖고 있지요. 박사학위는 없어도 우리나라 뮤지컬계의 선두주자라고 일컬을 만큼 화려한 경력도 자랑할 만합니다. 실기 위주의 특수대학원에 원장으로 특별 채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객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학이 신설학과나 대학원을 창설할 때 처음으로 뽑는 교수가 무척 중요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울 때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문제가 터지기 마련입니다. 그분은 대학원을 자기 전공인 뮤지컬 제작 중심으로 운영했지요. 커리큘럼과 교수진을 자기 입맛에 맞춰, 마치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겠지요.
그뿐인가요. 공연예술의 핵심인자인 연기 분야의 전임교수는 통 뽑지를 않는 답니다. 기껏해야 겸임교수나 초빙교수를 공개채용하면서도 원칙을 무시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생도 절실한 심정으로 2013년 후반기에 응시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서류에서 낙방을 시키더군요. 그분이 없었을 때는 최종에 올랐는데, 그분이 대학원장이 되면서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처음엔 대학 측의 괘씸죄를 상상해 보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총장도 바뀌고 보직교수들도 이동이 되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학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장관님!
혹시 아시나요? 그곳에서도 뉴스를 접할 수 있지요? 그분이 이번에 성추행에 결부된 ‘한국 뮤지컬계의 대부’라는 인간입니다. 잘 아시지요? 귀하를 장관으로 임명시킨 ‘대통령’의 취임식 행사에 총연출을 맡았던 위인이랍니다.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지요?
소생은 요즘 우리사회의 저변에 숨어있는 적폐세력에 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대안도 제시하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많습니다. 이 편지를 무척 고민하고 고뇌하면서 썼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서의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이번 성추행 및 성폭력에 추락한 대다수 괴물들의 공통분모는 자신들의 세계에서 왕 노릇을 했던 실권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귀하가 잘 알고 있는 그 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선의 가면을 쓰고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을 만들었지요. 그것도 모자라 위안부 문제를 다룬 <웬즈데이>를 제작하려다 덜컥 마각이 드러나자 제작을 포기했답니다. 성추행 당사자가 위안부 작품을 제작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표리부동(表裏不同) 아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당사자의 아들이 "충격과 통탄의 마음을 금할 길 없다”며 사과를 했을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귀하가 재직했던 대학, 그것도 귀하가 산파(産婆) 역할을 했던 공연예술대학원의 연기전공 전임교수로 ‘정통’ 괴물의 ‘페르소나(persona)’로 일컫는 분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거야 말로 그분의 데뷔작 <미친 동물의 역사>가 아닌가요? ‘페르소나’가 괴물의 ‘조력자’였다는 기사가 나오자 대학 측이 ‘강의 배제’라는 재빠른 순발력을 발휘했답니다. 제가 더 조사해 보니 이미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더군요. 체계적인 연기교육을 받은 것 같지도 않고, 교육자로서의 풍문도 그리 좋게는 들리지 않는 데, 어떻게 전임교수로 낙점을 받았을까요? 참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소생은 그 채용공모에 응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오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겁니다. 아마도 제가 응모했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겠지요.
사자성어가 한국에 와서 참 고생이 많네요. ‘줄탁동시’말입니다. 귀하와 제자 차은택이 ‘줄탁동시’하여 한국문화를 헝클어놓더니 이제는 괴물과 그 제자들이 ‘줄탁동시’하여 한국연극을 초토화시키고 있네요. 이제는 장문(長文)의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귀하가 ‘미투 운동’과 무관하다고 변명할까봐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 미투 운동은 ‘인권에 대한 혁명’이며 ‘평등사회를 위한 정의의 외침’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한 개인의 희망과 꿈을 유린한 귀하의 실수도 비판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귀하는 문화 권력의 중심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면서 그 알량한 권력을 동원, 본의가 아닐지라도 불의에 가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저의 진솔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서없이 글이 길어져 ‘아시아문화전당’과 ‘문화창조아카데미’의 수수께끼는 다음에 또 묻겠습니다. 귀하와 귀하의 제자, 그리고 그 제자의 추천으로 ‘문화콘텐츠진흥원’의 수장이 되었던 송성각과 그 밑에서 부역자 노릇을 했던 사람들과의 사슬에 관한 질문입니다. 창조가 아닌 파괴의‘줄탁동시’에 벌써부터 가슴이 저려옵니다. 청문회에서도 묻는 의원이 없어 소생이 질의하렵니다.
또 한분의 대통령이 사고를 쳤어요. 아니 오래 전에 저지른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네요. 시국(時局)이 어수선하니 다음 주에나 뵙겠습니다. 추운 날씨에 몸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나상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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