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고] 원숭이에 대한 기억들, 추억들
김병희(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전 한국PR학회 회장)
병신년(丙申年) 원숭이해가 밝았다. 붉은색의 병(丙)과 원숭이(申)가 만나 붉은 원숭이해가 시작되었다. 지난해 12월 18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연구팀은 지구로부터 14광년 떨어진 지역에서 지구와 닮은 쌍둥이 지구(울프 1061c)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지구의 4배 크기로 중력은 지구의 1.8배이며, 흙과 암석이 있어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고 그곳 탐사에 원숭이를 보낼 것이라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원숭이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화성 탐사선에 탑승할 4마리의 원숭이를 선발해 컴퓨터 조작법 같은 우주 탐사에 필요한 핵심 기능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붉은 원숭이해를 맞아 40대 이상의 부부 사이에서 늦둥이를 가지려는 열풍이 불고 있다. 중국 정부가 ‘두 자녀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한 영향도 크지만, 붉은 원숭이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지혜롭다는 속설을 믿고 기왕이면 2016년에 아이를 낳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병신년 내내 원숭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았고, 원숭이란 단어 자체가 17세기까지 만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원숭이는 우리 조상들의 일상생활에서 십이간지(十二干支)의 하나로 대우받을 만큼 중요한 동물이었다. 원숭이는 전통 회화나 문방사우 및 도자기의 주요 소재가 되었고, 설화나 가면극에는 꾀 많은 재주꾼으로 자주 등장했다. 원숭이띠를 ‘잔나비띠’라고도 했다.
원숭이는 영화의 소재로도 두루 활용되었다. 아마도 미국의 공상과학 영화 <혹성탈출>(1968)에 등장한 원숭이가 원숭이 영화배우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을 야만적인 동물로 묘사했고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같은 대형 유인원은 지능이 뛰어난 우점종(優占種)으로 형상화했다.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 |
어디 이뿐이겠는가. 연극 <멍키열전>(2014, 나상만 연출)에서는 문학작품에 등장한 주인공 원숭이들을 무대로 불러내 원전의 즐거리를 새롭게 구성했다. <서유기>(오승윤)의 손오공, <나의 이스마엘>(다니엘 퀸)의 이스마엘, <빨간 피터의 고백>(카프카)의 피터,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발미끼)의 하누만, <20세기의 셔츠>(얀 마델)의 버질, <이수르>(루고네스)의 이수르 같은 저명한 문학작품의 주인공인 원숭이들을 한데 집결시켜 놓았다.
이 연극에서 원숭이띠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첫줄은 이렇다. “신의 창조 의지를 망각하고 지구의 지배자임을 자처한 인류에게 더 이상 지구를 맡길 수 없다. 그리하여 인류의 한 뿌리인 우리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들은 한편의 연극을 위해 뭉쳤다.” 이 연극에서는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원숭이, 침팬지, 고릴라를 한 무대로 불러내 유랑극단 원숭이 열전(Monkey Players)의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원숭이는 게임의 단골 캐릭터로도 활약했다. 72가지 변신술을 가진 손오공은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원숭이 캐릭터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등장하는 오공은 서유기의 손오공과 외형은 물론 보유한 능력도 비슷하지만 설정이나 역할은 다르다. <세븐나이츠>의 손오공은 ‘사황’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환상 서유기>는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를 게임으로 만든 것이다.
국산 웹툰을 바탕으로 만든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도 손오공은 자신을 키워준 무투파 할아버지에게 태권도를 배워 무술 대회에서 전투를 하며 자신이 ‘제천대성 손오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들과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싸움과 원숭이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모바일 게임 <쌈숭이>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역대급 손오공을 등장시켜 인기를 모았다. 이 게임은 인간, 신선, 승려, 요괴 등 4개 종족의 강점과 약점을 활용한 수백 명의 영웅들과 팀을 이뤄 모험을 떠난다는 스토리로 구성된 3D 롤 플레잉 게임(RPG)이다.
연극 <빠알간 피터의 고백>으로 열연한 고(故) 추송웅 씨 |
원숭이와 관련해 연극배우 추송웅과 <빨간 피터의 고백>도 빼놓을 수 없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1977년 8월 20일 서울 명동에 있는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처음 공연됐다. 이 연극은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를 각색한 것으로, 아프리카 원정대에게 잡힌 원숭이 ‘빨간 피터’가 진정한 자유를 얻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겪는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피터의 독백을 통해 행복과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연극이었다. 1985년 작고한 연극배우 추송웅이 제작, 기획, 장치, 연출, 연기까지 1인 5역을 맡은 이 연극은 8년 동안 공연되었고 놀라운 흥행기록을 세우며 한국 연극계에 모노드라마 붐을 일으켰다.
원숭이는 재주가 많고 영리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동양 고전에는 원숭이와 관련된 낱말이 많다. 새끼 잃고 슬퍼하는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단장(斷腸)’이 대표적이다. 창자가 끊어질 듯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단장의 미아래 고개>라는 노래 제목도 원숭이 고사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장승업作<장승업필송하고승도> |
사자성어도 많다. 마음은 원숭이인데 생각은 말과 같다는 뜻으로 잠시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는 심원의마(心猿意馬), 원숭이를 가까이 하다보면 오랑우탄이 된다는 근원자성(近猿者猩), 개와 원숭이 사이처럼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로 당장의 차이에 신경 쓰지만 결과는 매한가지라는 의미나 잔꾀로 남을 농락한다는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있다. 원숭이에서 유래한 어휘는 이밖에도 많다.
병신년 새해를 맞이해 서울 경복궁의 국립민속박물관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2월 22일까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특별전이 열리고 있으니까. 전시회에서 조선말기의 화가 장승업이 소나무 줄기에 걸터앉은 노승에게 불경을 두 손으로 바치는 원숭이를 그린 <장승업필송하고승도(張承業筆松下高僧圖)>나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뜻에서 두 마리 게를 잡는 원숭이 모습을 그린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 같은 원숭이와 관련된 자료를 70여 점이나 감상할 수 있다.
N서울타워 원숭이 설치물 |
남산을 산책하는 것도 좋겠다. 남산에 가면 N서울타워를 기어오르는 고릴라의 뒤태를 바라볼 수 있다. 2015년 12월 중순, 남산의 N서울타워 하단에 높이 12.5m 폭 9m의 초대형 고릴라 아트벌룬이 남산타워를 기어오르는 포즈로 설치되었다. 고릴라 설치 조형물은 2016년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관광객들은 벌써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많이 한다고 한다. N서울타워의 새로운 마스코트가 될 것 같다. 병신년 새해 벽두에 원숭이띠든 아니든 우리 모두가 ‘빨간 피터’의 독백처럼 행복과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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