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달빛 결혼식> 연출 노트
1. <달빛 결혼식> 작품 선정 배경과 의도
우리 모두의 슬픈 기억이지만, 5.18이라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광주시민들은 광주가 아시아 문화중심도시이며 한국의 문화수도라는 자부심으로 위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광주에 아시아문화전당이 있다고 광주가 하루아침에 아시아 문화 중심도시가 될 수 없다. 광주비엔날레가 성공적으로 안착되었다고 광주를 한국의 문화수도라고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광주가 다른 도시에 비하여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예술작품들이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문화도시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진정한 문화도시는 메이드 인 로컬, 메이드 바이 지역 예술인들에 의한 격조 높은 창작물이 제작되고 유통, 소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광주시립극단은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양식의 연극을 제작하여 광주시민들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아울러 광주만의 색깔을 분명히 갖는 ‘광주형 킬러콘텐츠’ 공연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달빛 결혼식>은 나상만 예술감독이 열정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광주시립극단의 특성화와 글로벌화를 성취하기 위해 제작했던 연극 <멍키열전>에 이은 광주 브랜드 공연의 두 번째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극심한 갈등과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다. 5.18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승격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발포 명령자가 가려지지 않았고, 일부 정치인의 5.18 폄하 논란, 박근혜 탄핵, 전두환의 사자명예훼손 문제로 정치권과 사회가 양분되고 갈등을 겪고 있다.
연극 <달빛 결혼식>의 ‘달’은 ‘달구벌(대구)’의 준말이며 ‘빛’은 ‘빛고을(광주)’의 준말로 ‘달빛’은 대구와 광주를 상징하는 합성어이며 ‘결혼’은 두 지역의 화합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듯 연극 <달빛 결혼식>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잠복되어 있는 지역감정과 지역차별의 예민한 속살을 5.18 민주화운동과 연계하여 지역 화합과 광주정신의 예술적 승화를 목적으로 광주시립극단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연극이다. 다시 말해 인권과 평화의 도시 광주를 대표하는 브랜드 공연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작품 <달빛 결혼식>을 선정하게 되었다.
2. 1989년 작 <우덜은 하난기라>를 새롭게 각색, 각색의 방향성과 원작과의 차이점
연극 <우덜은 하난기라>는 ‘우리들은’ ‘하나다’라는 의미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사투리를 합성해서 만든 제목에서 보듯이 두 지역의 화합을 다룬 작품이다. 두 지역의 갈등과 차별의 여러 에피소드를 풍자와 해학으로 녹여낸 연극이다. 작가는 노태우 정권시대에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만든 작품이다”고 하지만 표현의 한계성을 느낀 시대였기에 광주 민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에피소드의 하나로 배려할 수밖에 없었다.
연극 <달빛 결혼식>은 5.18 민주화운동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내세운 작품이다. 예를 들어 원작(우덜은 하난기라)에서는 상대 지역에 대한 몰이해와 지역감정으로 인하여 극중 두 남녀가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동반자살하게 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5.18민주화 운동 당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다리를 다쳐, 양가의 결혼 승낙을 받지 못해 동반 자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역감정과 함께 광주민주화 운동이라는 극한 상황이 두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초연 당시의 작품이 지역감정의 해소에 있다면 이번 작품은 광주민주화 운동의 참상과 의미를 두 젊은이들의 죽음을 통해 고발하며 ‘영혼결혼식’이라는 제의의식을 통해 우리 사회의 화합이라는 미래적 희망과 꿈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연극 <달빛 결혼식>에는 22명의 배우가 등장한다. 초연 때는 6명의 배우가 출연하였는데, 그것은 연극의 경제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이번 작품은 그때 펼치지 못했던 몹신(군중장면)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민초들의 소리와 몸짓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예정이다.
3. 독특한 형식적 요소들에 대한(배우와 관객의 대화 형식, 서사극적 기법, 마당극적 요소, 인형극과 청문회적 수법 등) 보다 자세한 설명과 그 배경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을 전공한 나상만 예술감독이 야심차게 직접 쓰고 연출하는 연극 <달빛 결혼식>은 독특한 형식의 실험적인 작품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 연극인들은 자못 혼돈스러울 수 있다. 이에 대해 나상만 예술감독은 연출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은 스타니스랍스키보다는 그의 제자들인 박흐탄코프나 그로톱스키의 작품 스타일에 가깝다. 그러나 이 작품은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잘라 말한다.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은 정체되어 있지 않다. 시스템은 연극의 발전과 진공 속에서 진화하고 있다. 우리가 그에게서 추구해야 할 사항은 시스템의 절대화가 아니라 무대예술, 이론, 방법, 배우예술의 발전과 완성 속에서 그와 그의 가르침의 의의와 열정이 있는 것이다.”
연극 <달빛 결혼식>은 모두 12개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하나의 단편들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상여행렬’이라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영혼결혼식’이라는 에필로그에 귀착한다. 경상도 처녀와 전라도 충각의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두 지역의 갈등을 해학과 풍자로 터치하고 종국에는 두 영혼을 결혼시키는 제의로 끝을 맺는 연극이다.
이 연극은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이 도입되어 작품을 풀어간다. 이 연극의 가장 독특한 방식은 사실주의와 비사실주의 연기가 절충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사실주의적 연기가 적절하다고 믿었고, 어떤 장면에서는 비사실주의적 연기가 효과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 1인 다역이라는 장치를 쓸 수박에 없었고, 관객들을 연극의 적극적인 창조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객석과 무대와의 경계를 부수고 배우와 관객들의 소통 통로를 열어 두었다. 따라서 배우는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설득하여 공동체적 체험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현대연극의 세계적 조류는 대화 중심의 희곡에서 탈피하여 연극의 시각성과 청각성을 중시하는 공연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연극은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어 연극의 본질적인 요소인 배우 중심의 연극성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연극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가면의 활용을 극대화 하고 있다. 특히 사자들의 청문회에서는 사실주의적 인물(살아있는 청문회 의원들)과 비사실주의적 인물(저승의 청문회 증인들-김유신, 왕건, 박정희)이 동시에 등장한다. 가면이라는 인형으로 등장하는 고인들은 인형극을 통해 국회의원들의 신랄한 심문과 질의에 답변하며 지루하기 그지없는 역사적 사건들을 관객들에게 재미있게 제공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연극은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각 에피소드들이, 각 장면들이 신속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위한 보완장치로 작가는 서사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다. 자막의 활용을 통한 장면의 이해를 돕고 시간의 경과와 압축을 위한 서사적 대사는 극의 진행과 템포를 위한 연극적 장치이다.
이 연극의 또 하나의 특징은 코러스 배우의 설정과 기능에 있다. 코러스 배우는 관객과 배우의 매개체로 극의 진행을 돕고 극을 설명하고 관객을 극에 진행에 참여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한 사항은 5항과 6항의 인터뷰 답변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예정이다.
4. 전체적인 공연의 연출 콘셉트
1) 연극은 허구의 세계
연극은 하나의 약속이다. 희곡이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일지라도 약속된 허구의 이야기를 극적 문법에 의해 펼쳐 보이는 시청각적 예술이다. 역할을 창조하는 배우도 허구의 등장인물이며, 무대도 극장의 일부분이며 사건의 현장이 아니다. 무대장치, 대소도구, 의상 등 모든 것이 허구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에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스타니스랍스키는 이를 ‘무대적 진실’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무대의 모든 허구에 무대적 진실을 심어야 한다. 이것이 연극만의 특징이며, 배우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
2) 배우 중심의 연극
허구의 무대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무대적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배우뿐이다. 살아있는 배우의 신체와 음성만이 살아있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연극예술의 최후 보류는 살아있는 배우이다. 점잔빼고 당신을 관찰하고 있는 관객들을 창조의 참여자로 끌어들어야 한다. 그들을 충동시키고 자극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제1의 배우들’이 진실해야 한다. 무대적 진실을 수행하는 ‘제1의 배우들’이 ‘제2의 배우들’인 관객을 움직일 것이다.
3) 축제의 장
슬픈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야 한다. 현대인은 많은 아픔과 고통을 안고 산다. 불쌍한 관객들을 극장에 감금시켜 고문행위와 같은 그런 연극을 하지 말자. 연극은 원래 제의와 축제로부터 출발했다. 서양연극은 관객들을 극장에 감금시키는 고문행위를 오랜 동안 자행해 왔다. 이제 서양연극으로부터 탈피하여 연극 본연의 원시성과 현존성을 찾아야 한다.
<달빛 결혼식>은 축제의 연극이 되어야 한다. 극적 재미와 유쾌한 풍자와 해학으로 관객을 즐겁게 해야 한다. TV드라마와 영화, 스포츠와 오락과 게임이 할 수 없는 연극적 즐거움을 선사해야 한다. 연극만이 할 수 있는 재미. 그것은 관객과 배우, 제1의 배우와 제2의 배우가 함께 참여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연출은 배우의 연기 속에 산화되어 관객의 영혼 속에서 살아야 한다.
5. 무대와 관객석의 위치, 무대디자인 콘셉트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이라는 물리적 제약과 구조상의 한계는 있지만 무대와 관객석의 간극을 제거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연극적 장치로는 배우가 객석으로부터 등장하는 장면이 많고, 객석에서 배우들이 관객과 소통하고 연기를 하는 장면이 많아 객석과 무대와의 구분이 별로 없다. 따라서 객석의 불은 몇몇의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켜져 있어 배우의 연기 공간이 극장 전체로 확대되어 있다.
무대와 객석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코러스 공간이라는 특별한 무대디자인 콘셉트가 도입되었다. 객석과 무대와의 중간에 지점 상, 하수에 코러스 배우들이 극의 시작에서부터 계속 않아 있다. 코로스 배우들은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배우로, 때론 관객으로, 때론 극중 상황의 참여자로 등장하여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거나 관객들에게 극의 정보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다.
<달빛 결혼식>의 무대는 단순하다. 흑과 백의 아날로그적 텅 빈 무대에서 간단한 소품과 대도구가 있을 뿐, 극적 환상을 만드는 인위적 무대장치나 조명, 의상의 변화를 배제한다. 그리하여 암전시간을 최대한 줄이며 영화를 보는 듯한 빠른 템포 속에서 배우 중심의 연극이 펼쳐지게 된다.
6. 관객을 극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의도와 배경
서양연극과 동양연극의 근본적 차이점은 공연 도중 관객의 역할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서양연극에서 관객들은 무대 위의 사건들을 관찰하며 배우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우리시대의 영원한 연극 스승인 스타니스랍스키조차도 관객을 연극의 공동 창조자로 인식하면서도 극적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도록 하고 있었다.
인권이 신장되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는데 연극만이 창조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관객들의 사고나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뭔가’를 보여줄 것이니 너희들은 보고 느껴라.” 참으로 독단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관객도 공연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배우와 함께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장르, 모든 양식의 연극에서 관객이 적극적으로 극의 진행에 참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대의 우리 이야기를 하는데 관객을 방관자로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연극의 관객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배우들과 함께 각 에피소드가 제시하는 상황 속에서 사건에 직접 개입하는 참여자가 된다. 따라서 관객들은 국민의 한 사람, 장례식의 추모객, 선거 유세장의 시민, 야구장의 관중, 청문회장의 방청객, 결혼식장의 하객 등으로 분하면서 극중 역할을 담당하여 이 연극의 창조자의 일원이 된다. 그리하여 이 연극의 최종 목표인 공동체적 체험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서양연극이나 동양연극은 원래부터 제의나 축제로부터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동양연극은 연극의 원시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서양연극이 지나치게 분화되면서 연극의 고유성과 현존성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닐까. 그로톱스키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연극은 살아있는 배우와 살아있는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류”이다. 이번 연극은 그러한 연극의 원시성과 현존성을 오늘에 복원하고 관객에게 연극의 참여 권리(참극권)를 부여하여 우리의 초과제(우리의 자각과 화합)를 달성하고자 한다.
7.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
연극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관을 버리고 극장에 오시기 바란다. 연극은 스포츠보다도 재미있고 TV드라마보다도 유익하다. 연극은 인간이 창조한 가장 고귀한 예술이며 마지막 예술이다. 여러분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고 이 연극에 직접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이다. 5.18은 광주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 민족의 역사이다. 5,18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는 <달빛 결혼식>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민주의 성지, 인권과 평화의 도시, 광주에 오시길 기대한다.
월간 <한국연극> 인터뷰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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