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잠일기(栢蠶日記)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728x90

 

삼학도에서

그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유복자는 배(腹)에 남겨진(遺) 아이(子)로,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아이를 말한다. 어머니의 임신 중에 아버지가 사망하면 유복자로 태어난다.
 
그는 6.25 전쟁 중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전쟁 전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그리고 2년 후에 어머니가 임신하였는데, 그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공산당에게 처형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나왔다, 살아있었다면 한가락 하셨을 인물이었다. 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토끼같은 아내와 핏덩어리 딸, 그리고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 유복자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임을 당한 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말고도 그 아버지의 큰형,  또 잠시 처가에 피난 왔던 매형과 함께 공산당과 거기서 완장을 차고 있던 사람들에게 몰살을 당했다.
 
내 사촌 상희 형의 이야기다. 상희 형은 나보다 6살이 많다, 어린 시절 유교리 집의 아래채에서 살았다. 아버지 없이 편모슬하에서 목포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상희 형은 젓가락 공장을 운영했다. 고급 음식점에 나무젓가락을 주문, 제작, 납품했었다. 그때 나는 상희 형 집 근처의 마장동에서 따로 월세 하나를 얻어 학교를 다니며 아침과 저녁은 상희 형 집에서 먹었다. 그러다가 도곡동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청주에서 사는 상희 형이 문중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에 왔었다. 유교리 공주 형 집에서 하루 자고 갔다.
 
어제, 상희 형을 모시고 무안공과 반계공 할아버지가 잠드신 갈룡산,  금호공과 그 후손들이 잠드신 주룡 선산을 다녀왔다, 10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한 형이 선산에 오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형에게 물었는데, 형이 쾌히 승낙했다. 용포리 선산은 가보았으니 일로 선산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리가 불편한 형이 세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재배했다. 묵념만 하여도 괜찮다고 해도 기어이 무릎을 꿇고 두 번씩 엎드려 절을 하였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면서 자란 다리 불편한 유복자의 이 행동을 선조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들려준 선조들의 이야기에 상희 형은 무척 고무되었다. 그리고 왕릉 같은 묘소를 보며 “나주 나씨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조상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남겼으며 그 주인공들의 산소는 어디에 있는가?
 
경험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주룡의 힘을 체험한 형은 자긍심으로 생의 에너지를 얻고 청주로 돌아갔다, 남도 역사문화기행의 마지막을 유교리 고택에서 하고 싶었던 동생의 꿈이 더 지체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유교 총회에 참석한 인원이 무려 160명이었다. 그러한 뜨거운 열기가 선조들이 남긴 재산이 아니라 정신으로 연결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반계공파 유교문중 종친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는 없다.
 
상희 형을 목포역에서 내려주고 우리 부부는 삼학도를 다시 찾았다. 더 멋진 꿩의 모습을 담았다. 조상님 덕분이다. 상희 형도 나도 조상님들이 없었다면 어찌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어제 삼학도를 갈 수 있었던 것은 형 덕분이다. 상희 형이 총회 끝나고 그냥 청주로 갔다면 오늘의 꿩 사진도 글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숙부님도 상희 형도 6.25만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상희 형이 엄하게 가정교육을 시켰던 숙부. 나의 아버지를 지금도 존경하고 있음에 뿌듯함을 느낀다.
 
자정에 사진을 올려놓고 글은 새벽에 썼다. 눈물이 앞을 가려 새벽 5시에 겨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꿩아!
살아있다는 것의 행복을 아느냐?
 
아름다운 장끼야?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를 아느냐?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남녘 목포에. 무안땅에도...

무안공 묘소 앞에서 사촌형
2023. 4. 24.
728x90

'백잠일기(栢蠶日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을 낚는 사람들  (2) 2023.04.29
당당하게 서라  (0) 2023.04.26
겹벚꽃이 탐스럽게 피었구나!  (0) 2023.04.20
동백꽃 동행길  (2) 2023.03.15
임성리역(任城里驛) 가는 길  (0) 2023.03.04